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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14. 2020

여든 살

 



    팔순의 몸은 열렬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기도 그 자체이다. 가만히 해 질 녘을 바라보기만 해도 팔순의 몸은 기도이다. 형상을 바라보고 마음을 주는 것도 팔순에서야 가능하다. 무엇이든 다 이해되었고 수용되었고 겪었으며 바랐고 또한 빛바래기도 했다. 팔순의 몸은 뜻밖의 깊이로 꺼져 들어가는 낡은 소파 위의 몸처럼 어느 날 불현 듯 찾아오는 몸이 아니다. 그 몸은 충실히 살고 또 살고 또 살아내고서야 만나는 몸이다. 당혹하지 않는 몸이다. 충분하다, 그 너머까지 충분하다. 가을 끝자락 노모를 기다리는 목욕탕 입구, 소파에 앉아 기다리면서 생각한다. 팔순의 몸이란 몸에서 파슬파슬 정전기가 일어나듯 영혼이 발현 되는 몸이다. 간이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거나, 공장 옹벽 근처에 널브러진 종이상자를 쟁기는 몸 혹은 해거름에 삼삼오오 들판 샛길을 걷는 몸들은 계산이나 확신 묘사나 인상을 가지지 않는 몸이다. 팔순이란 공기와 같다. 생의 수명을 팔순이라 정했다고 한다면, 그 몸에 닿기까지 몸이 겪은 생의 수많은 물결은 결국 피부의 잔주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주름에 경외감을 느끼는 이 누가 있으리. 치매를 걱정하고 돌연사를 걱정하고 노쇠한 걸음 중에 닿는 세상에 대한 어눌한 감각을 걱정해야 할까. 아니면 ‘충분하다, 더 이상 뭘 바라’ 말할 수 있을까. 팔순은 몸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갔었고 충분히 그 몸을 주고 내어준 몸이다. 상상해 본다. 내가 팔순의 몸이 된다. 혼자서 목욕을 하고 느리게 흐린 시야로 푸른 하늘의 감각을 단지 기억에 의존하고, 햇살의 타격도 미약하게 느끼고 무엇보다 마음에 닿는 언어가 입에서 발음 되지 않고 아름다움이나 진리에 대한 묘사 능력이 떨어지고. 막바지 생에 달라붙는 세상사의 잡다한 뉴스 가십거리들에 몸의 주위를 맴돌 때, 나는 그때 내게서 사라진 몸을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지나간 몸을 옹호하고 기뻐하고 보내주는 진정한 탈인간화된 몸을 나는 살아냈고 만족한다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고집에 다름 아닌 자존심을 내세워 세상살이 잡다한 것들에 앙심과 집착에 몸의 한계와 정반대의 마음 들끓는 미혹에 휩싸이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 때에도 철새는 비상하고 경탄하면서 읽었던 시의 한 소절을 암송하고 옛사람을 생각하며 찻잔에 잔받침 닿아 내는 소리 같은 영롱한 기억을 한 방울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몸의 밖에서 여전히 이 몸을 찾아오는 어떤 몸이 찾아오는 가을. 출렁거리며 흘러가는 구름에게서 나는 내 몸이 거기 있음을 본다. 여든 살이 오기도 전에 만나버린 여든 살의 몸. 



Karl Schmidt-Rottluff - Pomeranian Farmers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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