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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1. 2020

새우잠




  전나무 밑에는 은박의 돗자리를 깔고 한 사내가 새우잠에 빠져 있다. 휴일의 야영장에는 한 무리 직장인들 야유회를 하고 있다.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놀다 버리고 간 쓰레기더미 근처에는 까마귀 떼들 번들거리는 검은 옷을 입고 서성거리고 있다. 족구를 하느라 술잔을 돌리느라 시끌벅적한 사람들 얼굴에 초봄 햇살이 쏟아지지만 가만히 있으면 으슬 한기가 어깨를 떨게 한다. 공동화장실 근처에 산수유가 피었지만 누구 한 사람 사진을 찍거나 꽃구경하는 이 없다. 은박의 돗자리 위 중회색 일복 입은 남자의 새우잠은 일대의 소란스러움과는 상반되게 고립되고 섬처럼 이질적이다. 술이 약해 일찌감치 쓰러졌거나 야유회 시작부터 작정하고 마신 과음으로 이거나 야근 하느라 모자란 잠과 술기운이 겹친 새우잠. 누구나 한번을 그렇게 잠들어 본적 있는 은박의 돗자리 위 눈부신 잠. 봄바람에 파르르 떠는 전나무 그늘을 덮고 자는 새우잠. 한줄기 햇살이 그의 귓불을 발갛게 달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잠든 새우잠. 번개탄에 구운 고기냄새가 입안에 그득한 새우잠. 뼛속까지 스민 야근의 피로를 보여주는 새우잠. 나뭇잎 몇 장 바람에 뒤집어 질 때 새우잠의 몸도 한번 뒤척였지만 웅크린 몸은 풀어놓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소리 질러 그의 이름이 직책을 부른다 해도 좀체 풀어지지 않을 새우잠. 두 손 사타구니께 찔러 넣은 새우잠에는 어떤 꿈이 필요할까. 아마도 구월을, 아마도 구월을 꿈꿀 거야. 오지 않았고 올지도 모를 구월을. 삼월인데도 막연히 구월을 꿈꿀 거야. 그의 귓불에 대고 구월, 구월하고 속삭이면 굳은 몸이 풀어질 거야. 아마도 구월을 꿈꿀 거야. 우리 생에 어느 때 꼭 필요한 구월. 구월하고 속삭여주면 사타구니께 두 손이 빠져나오고 뼈마디 소리 나는 기지개 펴게 될 거야. 아마도 구월을 꿈꾸고 있을 거야 당신의 새우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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