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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1. 2020

춘설



  춘설이다. 달빛 대신 춘설이다. 달빛을 먹고 봄물 길어 올려야 할 나무들 위로 춘설이다. 봄꽃처럼 사나흘도 못 견디는 춘설이다. 야음을 틈타 샐녘까지 나리는 춘설이다. 세상에 흰추위를 마지막 선물하는 춘설이다. 고요가 폭폭 쌓이는 춘설이다. 무한정으로 내리지만 오전의 햇살에 사라지는 춘설이다. 가난한 겨울나무들에게 첫날옷을 입히는 춘설이다. 기찻길 건너 앞산 소나무 높가지에 내려앉는 춘설이다. 느린 화물열차 등에 실려 도시로 가는 춘설이다. 귓불에 내려앉는 춘설이다. 귓불에 닿자마자 희미한 발음으로 사라지는 춘설이다. 공중의 언어를 알아챌 수 없는 귓불이지만 귀기울여보는 춘설이다. 봄의 꽃잎 보다 더 빠른 이별의 춘설이다. 죽은 나뭇가지를 나무에서 내려주는 춘설이다. 갓 핀 산수유에게 비나리하는 춘설이다. 무한 공간 별들의 언어로 내려와 한 나절 햇살에 자취 없는 춘설이다. 문 앞에 우두커니 멎게 하는 춘설이다. 나만이 사랑하는 문장을 찾아 읽게 하는 춘설이다. 낡은 나무벤치가 있는 담 밖 버스정류소에 앉아 빈 들을 보게 하는 춘설이다. 한 겹 옷을 더 입게 하는 춘설이다. 산수유 위에 쌓인 눈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춘설이다. 봄기운 때문에 기억이 설핏한 춘설이다. 어릴 적 뒷집 흙담장 너머로 들리던 키 큰 누이의 울음 같은 춘설이다. 시집갔다는 것 말고 더 이상 아무런 소식 없는 것처럼 사라질 춘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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