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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1. 2020

측백나무 냄새



  고향의 성당에는 어릴 때부터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마룻바닥 삐거덕거리는 성당에 미사 하러 가기 전에는 꼭 치러야 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게 있었다. 그것은 성당 입구에 심어진 측백나무 잎을 손바닥으로 스치며 걷는 것이었다. 그리곤 손바닥에 스민 나무의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본래대로 표현하자면 '측백나무 향기'라고 해야겠지만 어릴 때부터 측백나무는 내게 일종의 '하느님 냄새' 같은 것이었으며, 더군다나 시골 사는 아이에게 향기라는 말은 익숙하지가 않았기에 유년시절 어법대로 측백나무 냄새로 부르기로 한다. 이파리의 맛은 맵고 쓰다. 윤곽은 대문자 W의 갈래를 가지고 있다. 겨울바람에 쇳소리가 났다. 나무 곁을 걸으면 옅은 호흡을 내어 사람의 코를 살며시 자극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심신의 매무새를 고치게 되었다. 그렇다고 열렬한 신자는 아니어서, 미사 중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오길 밥 먹듯 하였지만, 측백나무 아래 등받이 없는 녹색 페인트가 덧칠된 철제 의자에 앉으면 머릿결 위로 어른어른하고 조곤조곤 무어라 속삭여 주기도 했다. 그러한 경험은 개인적으론 참으로 시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그 내밀한 시적 즐거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름날의 해거름 그림자를 끌고 저녁 산책길에 성당에 닿았다가 측백나무 냄새를 맡았던 시간들은 영원성으로 각인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느끼고 숨긴 측백나무 냄새에 대한 이야기는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리라. 나와 함께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많은 이웃 친구들마다 개인적인 측백나무 이야기가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의 측백나무 이야기가 나는 참 궁금하기도 하다. 그렇게 청년시절이 끝나고 세월이 가고 성당에 나가지도 않는 냉담자가 되었지만 나는 어디에서든 측백나무만 보면 마음 한편이 환해지고 동시에 가난해진다. 어떤 여행의 밤, 충남 예산 수덕사 아래 여관방 유리창을 열었을 때 와락 풍겨 왔던 측백나무 냄새에 끌려 밖으로 나가 마셨던 공기의 맛. 또 어떤 밤에는 측백나무 아래에서 열렬히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모순 많은 성격의 여자 주인공을 만들어 '측백나무 냄새'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을 써 보기도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인생나무'라고 말할까. 측백나무는 개인적으로 여전히 노스탤지어의 영역에 닿아 있는 나무다. 어느 새 나이 먹고 세월이 바뀌고도 모자라 나무조차 노회했을 그런 세월이었을까. 발길 끊어진 성당 쪽의 산책, 문득 기억에 가물가물해진 측백나무 그 잎새의 맛이 그리워 바삐 걸어 가보았던 성당. 그러나 본당의 입구 왼편을 도열해 있었던 측백나무들, 나를 경건하게 성장시켜주고 가난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준 측백나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뿌리의 흔적도 없었다. 기억에 잔존한 희미한 영상으로 나는 나무들을 잠깐 상상했다. 아, 나의 하느님 냄새! 가난한 여름날 해거름에 나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 나무들 아래 깔려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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