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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an 25. 2022

여름이라



   여름이라

   

  맷비둘기와 와서 석회질의 울음을 운다. 주목의 여름 그늘이 둥글고 짙다. 직박구리 한 쌍이 키 낮은 청단풍 가지 위에서 출렁거린다. 흙담장 너머 목재더미에서 낳아 기른 어린 고양이 두 마리를 젖이 말라버린 어미가 집 마당으로 데리고 온다. 막노동 판에서 쓰고 가져온 노란 안전모 속에 담긴 사료를 고양이 가족이 먹는다. 그리고 어느 날 어미는 종적이 묘연하다. 두 마리 어린 고양이는 세상 모든 사태들을 처음 겪는다. 경계와 불안의 눈을 홉 뜨고 척추는 긴장을 풀지 않는다. 언제든 달아날 근육의 긴장.  나뭇가지가 출렁거려도 소스라친다. 어린 풀들과 함께 자란다. 고양이와 뙤약볕. 마당의 오후다. 나무들은 검푸른 그늘의 농도를 움켜쥐고 있다. 비둘기의 석회질 울음이 간간 담 밖의 채소하우스 근처에서 다시 들린다. 여름이 핏덩이는 어린 고양이 뿐만 아니다. 어린 핏덩이는 사지사방에 태어나고 숨어 있고 가려지고 불안하고 어미를 기다리고 운다. 어린 핏덩이를 가지고 사랑하고 도피하고 달아나고 숨고 그리고 키우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세상 사람들 등지고 바닷가에서 바다를 기다리는 사람. 바닷가에서 바다를 기다리며 바다에게 할말을 품은 사람. 석회질의 울음을 품은 사람.

  

 여름밤은 꿈꾸기의 밤이다. 파충류가 되거나, 연꽃이 되는 꿈꾸기의 밤이다. 어떤 꿈에는 밀쳐두었던 그리움을 관엽식물에서 찾는다. 나와 끈적거리는 잎새는 살을 부빈다. 깬다. 슬리퍼를 끌고 밤의 나무 아래 선다. 꿈의 연장선에 선다. 별과 별 사이 검은 공백은 끈적거린다. 검은 진흙뻘처럼 물컹한 깊이가 있다. 또다른 여름 밤은 풀이 돋지 못하게 깔아놓은 비닐장판 같다. 사람의 삶에 비유한다면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는 강박증의 주기이다. 인생의 헛헛한 시기이다. 심중에 숨겨도 인상에 드러나는 헛헛한 시기. 그러나 여름은 헛헛한 거기에서 폭발하는 생성을 본다. 필생의 사력을 다해버리는 사실과 이미지가 여름의 호흡이다. 견디고 땀을 흘리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 끈끈한 인식의 문장들을 태어난다. 겨울이나 봄에는 읽혀지지 않는 책이 폭발하는 여름 정원 앞에서읽힌다. 던져둔 습작시가 온전한 이미지 덩어리로 꿈틀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이 내가 쓴 것인가 싶다. 무의식에서 인식의 시편으로 생성되는 한 줄. 빗줄기에 젖어서 새로워지는 풀줄기 같은 한 줄 문장. 그래, 여름이란, 한 나절이 재탄생이다. 그것은 심리적인 요소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강철을 휘게 하는 열기와 빛의 농도이기도 하다다. 살아보라, 더 강렬하게 살아보라는 여름의 바깥. 석회질의 울음을 울어주는 멧비둘기와 함께.


 밤은 그러하다. 밤의 공허를 사랑하는 사람은 밤에만 눈을 뜬다. 그는 세상의 소란스러움을 재구성한다. 낮의 일상은 밤의 질료이며 언어의 벽돌이다. 언어의 궁륭을 짓고 그는 시인이 된다. 먼 기억의 시간을 되새겨 본다. 시를 꿈꾸던 시절의 밤은 피와 살과 다리 하나를 한 편의 시와 맞바꾸어도 되었다. 잠은 구차했다. 잠은 의식에서 밀려나고 밀려났다. 누더기 같은 잠을 자는 것은 수치며 절박한 시간의 한 귀퉁에서 썩고 있는 미지였다. 창밖의 밤은 이내 희부윰해지고 의식은 은납처럼 변한다. 밤을 꼬박 새웠던 몰입의 진동으로 낮은 시간은 전날 밤의 습작한 이미지들과 인식의 모호성을 되새김질 하는 것으로 보낸다. 간밤의 문장들은 둥둥 떠나니는 안갯속의 발걸음 같았다. 새로운 자극과 감각의 문장들 곁에서 밤을 지샌 기쁨은 더 없는 지복의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고 싶지 않은 생의 자극이다. 아이들이 여럿이 남너머 이웃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친근한 공기 속에서, 그러나 여전히 시인 될 자격은 아니고 사물의 속성 값에 인식과 세상 값을 찾았다. 얼마나 협소한가 세상이란게 그러니 시 쓰기를 위한 세상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습기 가득한 벽돌 건물의 열기가 가시지 않는 여름 밤을 ,달에서 신작로까지 뭉크에서 오체투지까지 상호적이지도 의존적이지 않은 관계의 언어를 찾아내는 협소가 시인의 거처이다.


 그가 왔습니다. 이 여름에

 매일 그가 왔습니다. 이 여름에.

 부패하고 신생하는 그가 왔습니다.

 무결점의 달을 배경으로 그가 왔습니다.

 무의식에 누수를 뚫고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이 이러할 때에는 의식에 관여를 금해야 합니다.

 여름 밤의 누런 달이 미열에 시달리는 듯이 어른거린 했던가요.


  여름은 직관의 힘을 준다. 길을 나서면나무와 풀섶에 빌붙어 사는 등이 파란 곤충들. 날짐승의 흔적들. 새들이 지은 집. 동물의 사체 썩는 냄새 그리고 돌의 이끼와 습한 공기 속에 들어 있는 부패하는 풀냄새가 뒤섞여 있다. 직관은 내가 살고 있으며 지금 내가 걷고 있으며 지금 내가 공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에서 공기 속으로 죽음의 길을 바라보는 것까지 한번에 닥친다. 그 닥침이 심장을 떨게 한다. 급하게 메모를 한다. 더 밀고 들어가보자. 햇살을 받아 들이는 식물의 습관처럼, 더 밀고 들어가보자. 상상력의 빈 배를 뭍에서 수면으로 밀고 들어가보자. 갱도를 파고 드는 광부의 곡괭이처럼 근육을 반복하면서 들어가보자. 그러면 무연고의 새들이 지척에서 그들의 평온을 깨는 나의 발걸음에 달아난다. 희고 노련한 날갯짓의 백로이다. 얼마나 우아한가. 그리고 얼마나 배고픈가. 저 몸피에서 배가 부른 적이 있었던가. 얼마나 가벼운 무게인가. 공중은 또 얼마나  부드러운가. 목화솜 같은 숨을 내쉬고 메모를 한다.

  

  여름은 그에게 짙은 향수와 같은 사막의 삶을 상상한다. 장맛비 이후 한낮의 폭염에 찐득거리는 피부와 마룻바닥, 습한 벽지와 입맛이 가시는 밤이면 사막을 느낀다. 짙어가는 하늘의 잿빛이 마을을 뒤덮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방안까지 밀려오고 코끝에 먼 곳의 흙냄새가 베어들면, 그는 곧장 사막에 대한 문장을 연습한다. 어떤 곳인가. 사람들의 손은 척박하고 발바닥은 낙타의 발음 닮았을 것이다. 국가가 없는 부족들, 전등이 없는 밤의 부족들, 유목과 눈부신 태양빛의 미래가 전부인 부족들. 밤이면 냉기와 별빛이 사막을 점령하고 잠이 들었을 때 금빛 호수의 꿈을 꾸는 부족들. 초록의 대지를 살지 못했기에 초록의 별빛에 두려움을 느끼는 부족들. 숨결에서 빵 냄새와 양고기의 누린내가 나는 부족들. 그들 부족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낙타들. 그것이 사막이다. 그 사막에 인간과 낙타 무리들에서 나는 체취와 공기의 질감 걸음걸이와 먼지를 생각하면서 그는 창 밖의 소낙비를 견딘다. 축축한 나무들의 어깨가 흔들리고 새들이 젖은 몸을 하고 황급히 빗속을 뚫는다. 그는 다시 문장을 쓴다.  


  우기의 날들 사이에서 그는 사막을 읽고 사막을 생각한다. 비가 오고, 비가 오지 않는다. 내리지 않는 폭우다. 사막은 견디기 위해 걸어야 하는 곳이며 비의 세계는 견디기 위해 실루엣을 친다. 그리고 두 개의  침묵을 견딘다. 사막의 침묵은 무결점의 황폐한 침묵이다. 황폐한 침묵의 고원에서 푸른 눈의 부족들은 기도를 얻고 보이지 않는 신을 찾았으리라. 왜냐하면 그들에게 생은 단지 모랫바람과 낙타걸음과 염소와 양의 숨결 밖에 더는 아니기 때문이다. 더는 느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삶의 조건은 최적이며 최고의 희망도 그곳에서 유랑하는 것이니까. 언젠가는 그 푸른 눈의 부족에게 가서 내가 겪은 여름 밤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노래하듯 들려주리라. 그들이 밤의 하늘 속에 내가 사는 푸른 산과 수목과 여름의 열기 후텁지근하고 피부가 닿기만 해도 사람이 미워지는 도무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딴 세상을 이야기를 해주리라. 나의 지금 여기를, 여름밤의 사랑을, 여름 날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 해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푸른 눈의 유랑 부족들에게 이별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애정의 문제로 이별을 하는 일은 홀로 낙타가 되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비가 젖은 돌을 더 젖게 한다. 돌멩이가 꿈틀한다.


 내가 들려주는 여름밤의 이야기를 푸른 눈의 그들이 모닥불을 피운 사막에 들려줄 때는 나는 맨 먼제 내가 사랑하는 식물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그들에게 식물의 이름을 이야기 한 들 그들은 상상도 이해도 할 수 없을 것이기에 나는 너무나 물을 좋아하는 식물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그들의 갈증처럼 내가 좋아하는 식물은 하루가 멀다하고 물을 줘야 하면 물을 머금고 머금고 머금은 후에 내놓은 꽃은 향기가 없이 오로지 색채와 질감의 꽃으로 여름의 밤 혹은 늦봄의 여름에 핀다는 것으 이야기해 줄 것이다.


 내가 들려주는 여름밤의 이야기를 베두윈족에게 들려준다. 모닥불이 탄다. 낙타의 배설물을 말린 모닥불이다. 그들은 내가 말하는 식물 들을 상상한다. 나는 내가 기르는 식물들을 이야기 해준다. 밤의 별들이 보고 나무로 상상하게 말해준다. 그들의 갈증처럼 매일 나무들에게 물을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한다. 나무들도 기도를 하고, 서러워 하며, 어깨가 있고 걸어다니는 발목이 있지만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이 별의 밤을 걷듯이 나무들도 우리가 잠든 사이 별의 밤을 유랑하다 돌아온다고 말해준다. 모닥불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람들은 숨소리를 낸다. 숨소리에도 모래가 서걱거린다. 나는 물을 너무나 좋아하는 수국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늘지고 습하고 물을 마시는 향기가 없는 꽃이야기를 한다. 물을 그렇게나 마시고도 세상에 내놓는 꽃에 향기가 없는 수국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밤의 별을 꽃 닮은 꽃들이 여름 그늘에 피어난다고 말해준다. 내 이야기를 어린 아이들의 눈에 파란 별수국이 핀다. 깜빡거리는 고양이 새끼 같다.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그들 내부에 깊이 잠재된 갈증과 어둡고 더듬을 수 없는 냉기 서린 동굴 같은 밤의 공기를 내가 들려주는 식물의 이야기로 축축해지는 시간을 가진다. 그들에게 물을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신 식물이 내놓는 꽃이 수명을 다하고 지나고서도 겨우내 바싹거리는 질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들의 물기 없는 손바닥을 내보인다. 그래, 그러하다. 꽃의 수명 너머에 또다른 수명이 있다. 그들의 손바닥과 펼친 밤의 공기 속에 푸른 별의 수명이 바싹거린다. 아이들은 졸리고 깜밖거리는 눈에서 바싹거리는 소리가 난다.


  사막을 충분히 살아본 이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다. 현자이다. 나는 거룩한 그들의 눈빛, 사막에서 길어올린 눈빛에 경외감을 느낀다. 내가 곁을 주고 그들 언어를 경청하고 침묵을 함께 나누고 싶은 거룩한 경외심의 현자들. 그들이 목동이든 방랑객이든 사진을 찍는 작가이든 밤의 별자리이든 사막에 거처하고 사막을 배회하는 낙타의 발자국에 까지 나는 거룩한 경외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거기에선 가식으로 살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선 문명인으러만 살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선 감상으로 살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선 깊이로도 살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떠돌며 흐르고 유동하는 뱀처럼 갈피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헤매는 떠돎이 있고 떠도는 정착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나의 현자들은 여름의 정원과 젖은 적막을 밤을 내게서 듣고 시로 읊을 것이다. 그러면 사막은 초록의 대지와 언덕이 되고 숲이 울창한 여름 밤이 될 것이다. 머리 위에 파란 별 하나가 저 숲 너머로 달려간다.


 그런 밤이 끝나고 나면 그는 읍내의 오일장 난전에 허리가 꼬부라진 팔순을 훨씬 넘긴 노파를 찾아간다.몇 해 전 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난전에서 명태 껍질 같은 뻣뻣한 손이 옆자리에 또 다른 명태 껍질 같은, 뼈마디라 도드라진 굳은 손을 어루만져주는 두 노파를 지나치며 보았다. 짧은 걸음 동안 본 장면이지만 몇 해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양은 냄비에 흰죽을 담아 놓고 한 노파가 먹다 남겼다. 식어 꾸들해진 흰죽 덩이가 얼마나 차가웠던가. 도라지 껍질을 벗기며 노상의 건물 외벽에 구겨진 듯, 나무의 옹이 같았던 노파. 여름 날의 노상에 견딜 수 없는 고행승이 달리 먼 나라 남방 불교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 곁에서 온 생의 열정을 담담히 살고 고통스럽게 살고 각고의 노력으로 사는 이들. 그들이 현자들이며 깨우친 이들이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 속에 얼마나 무한한 필름이 펼쳐져 있는가.

 

 장마

  "푹 젖은 것들의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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