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뤼미나시옹 Oct 18. 2021

파주,라는 이름의 여자

파주,라는 이름의 여자

  

   마지막 한 모금의 담배를 빨고 침을 뱉는다. 파주, 라는 이름의 여자다. 나는 그녀를 모르지만 또한 그녀를 잘 알고 있다. 운명을 믿지 않고 돈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돈이 필요한 여자. 나는 그녀 근처에 살지도 않고 그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를 잘 알고 있다. 파주, 라는 이름 안에는 물이끼 낀 산책길이 휘어져 있고, 흰 종아리를 드러내고 그녀가 걷는 길을 나는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 방금 자전거를 끄는 노인이 그녀 옆을 지나갔고 빗방울을 매달고 있던 나뭇잎에서 굵은 물방울이 파주의 어깨를 때렸다. 그녀는 세상을 희미하게 살며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골목에는 고등어 냄새가 고여 있고 이웃의 자동차 밑에는 털이 곤두선 고양이가 오도마니 앉아 있다. 늦여름의 열기 속으로 퇴근시간이 끈적거린다. 골목에서 그녀의 이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무 몇 그루와 심야의 오렌지 빛 가로등 몇 개가 그녀의 체취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어떤 시적 상태에서 집을 나와 마을을 배회할 때,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핥으면서 놀이터 근처를 걸을 때, 나는 파주, 라는 이름의 여자가 내 이웃에도 살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파주, 라는 이름의 여자는 세상의 골목마다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쾌하고 무탈한 일상 같지만 몇 달 전에는 아무도 모르게 낙태를 했거나, 남자 친구의 부모에게 협박을 당했거나, 노래 부를 때마다 내심을 드러내고 울부짖고 마는 파주.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파주, 라는 이름의 여자를 알고 있다. 운명을 믿지 않고 돈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조금의 돈이 필요한 여자. 경유 자동차 매연이 창으로 들어오는 혼자만의 방에서 통속극을 보며 때 이른 잠을 쫓는 여자가 있다. 첼로 협주곡 B단조를 즐겨 듣지만 비발디의 것인지 조지 거쉰의 것인지 관심 없는 파주, 라는 이름의 여자는 파사주에서 왔고 파시주는 밀물이 가서 돌아오는 동안 유예된 일회성 풍경에서 왔다.만나 보거나 뒷모습을 좇거나 가로등처럼 체취를 맡지도 않았지만 고등어 굽는 냄새가 쉬이 여름 공기 속에서 지워지지 않듯 파주라는 이름의 여자를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녀는 지금 먼 곳에 시선을 두고 파마한 뒷머리를 손으로 어르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