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다
새들의 저녁이 있다.
돌멩이의 잿빛 저녁이 있고 저수지의 먹빛 저녁이 있다 걷다가 자꾸만 뒤돌아보는 떠돌이 개의 저녁이 있고 양조장 막걸리를 비닐봉지에 담아 가는 역광의 검푸른 실루엣이 있다 농협 앞 노점의 주름진 사과를 노파의 주름진 손이 닦고 있고 황급히 택배 상자를 내려놓고 사라지는 사내의 저녁은 사내만 살아내는 저녁. 가난한 저녁이 있어 거기 발 담그거나 손을 넣었다 빼내기도 했을 것이며 그래, 슬픔이 전부인 저녁이 있어 한 날 한 시에 슬픔에 젖는 저녁을 우리는 살았다. 고양이는 주차한 자동차 엔진 밑에 오도카니 앉아 저의 시린 등을 데우고 살아낸 날들의 무게만큼이나 허리가 꼬부라지는 노모의 저녁은 물기 가시지 않는 손등에 있다. 타국에서 온 얼굴이 까만 사내들 눈망울엔 선한 물빛의 저녁이며 조립식 패널로 지은 옥탑방은 색이 바래 저녁의 풍경에 끼어들지도 못하는
저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