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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18. 2021

저녁이 있다

저녁이 있다



새들의 저녁이 있다.

돌멩이의 잿빛 저녁이 있고 저수지의 먹빛 저녁이 있다 걷다가 자꾸만 뒤돌아보는 떠돌이 개의 저녁이 있고 양조장 막걸리를 비닐봉지에 담아 가는 역광의 검푸른 실루엣이 있다 농협 앞 노점의 주름진 사과를 노파의 주름진 손이 닦고 있고 황급히 택배 상자를 내려놓고 사라지는 사내의 저녁은 사내만 살아내는 저녁. 가난한 저녁이 있어 거기 발 담그거나 손을 넣었다 빼내기도 했을 것이며 그래, 슬픔이 전부인 저녁이 있어 한 날 한 시에 슬픔에 젖는 저녁을 우리는 살았다. 고양이는 주차한 자동차 엔진 밑에 오도카니 앉아 저의 시린 등을 데우고 살아낸 날들의 무게만큼이나 허리가 꼬부라지는 노모의 저녁은 물기 가시지 않는 손등에 있다. 타국에서 온 얼굴이 까만 사내들 눈망울엔 선한 물빛의 저녁이며 조립식 패널로 지은 옥탑방은 색이 바래 저녁의 풍경에 끼어들지도 못하는

 

저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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