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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Aug 28. 2018

마크 로스코 : 화이트 센터


어떤 식으로 색채의 벽을, 색채의 내면을 해석할 것인가.

내가 나 밖에 될 수 없음을 알았던 시인들은

자기의 일상을 세계의 문제와 아픔으로 받아들인다.

더불어 기쁨도 그러하다.

집의 한쪽 모퉁이에는 나팔꽃 덤불이 늦여름 장맛비를 흠뻑 머금어

활기가 넘쳐난다. 그 결과물로 나팔꽃을 덤불에 활활 피워냈다.

여기서 '활활'이란 말은 그야말로 불꽃처럼 피웠다는 것이다.

로스코의 그림을 감상하는 법은 이미 많은 이들이 그림에 대해 익숙한 정보를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감상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또 다르게 이 색채의 감정에 따라가 보려 한다.

어쩌면 세상의 일은 모두 마음의 작용이라는 말이

그림에 대해서도 그러하듯, 마음의 작용은 분명하다.

기쁨의 감정이 충만하다면, 그림은 우리의 심성에 봄기운 가득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점심시간에 한잔의 반주로 불콰해진 기분. 반주로 나른 해진 오후의 감정으로 받아들여도 무관하다

색면추상을 사실적인 감정으로의 치환.

어떤 이는 순수함의 극대화의 관점에서, 중앙의 흰 부분에 심중의 무게를 풀어낼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부드러운 다가옴, 거품 머금은 파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느 한순간.

<과자를 먹던 순간, 접시에 포크가 부딪치던 순간, 구두에 발을 넣은 한 순간>

느닷없이 잃어버린 시간,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  물밀듯 밀려오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색면추상은 사실적 경험의 되새김을 일으키게 한다.

짧은 한 순간, 별이 태어나는 빅뱅처럼

이미지의 한 순간이 폭발해서  감상자의 마음에 사건의 별이 태어나게 하고

색채의 농도와 온도에서

또 다른 이미지의 별이 내면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멈춤에서 운동으로

색면추상의 언어는

절대화를 말하지 않고

숭고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무의식으로부터

개별화된 차이의 사건들로부터

무한한 감각의 증식을

중첩된 감정의 격앙을

태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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