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화지, 파란 하늘에
-김정용
가을을 버린 은사시나무가 서 있다
실패한 은사시나무 그림을 품고 아이가 자랐다
결말을 알아버린 나이 여덟 살
그 때 돌멩이 던지는 법을 알았다
결말을 알아버린 드라마를 다시 보는
토요일 오후처럼
하얀 도화지에 하늘이 파랬다
결말을 알아버린 드라마를 또 보는
토요일 오후의 지루함처럼
하얀 도화지에 하늘이 또 파랬다
색깔이 흘러와 눈을 가득 채웠지만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없는 여덟 살
결말이 나버린 나무 밑에 아이가 웅크려 있다
덜 자란 아이가 애늙이를 겪는
하얀 도화지 파란 하늘을 겪었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죽은 송아지를 그리고 아이가 자랐다
하얀 도화지, 파란 하늘이 제초제 냄새를 맡았다
하얀 도화지에, 파란 하늘
갓 여덟에 여든 아홉의 하늘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