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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by 일뤼미나시옹


번아웃

- 김정용



해의 지루하고 느린 흐름 따라 무릎걸음을 했지

초콜릿을 쌓아놓고 선물로 쓸까 먹어치울까

흐림 사이에 낀 청테이프 같은 하늘을 떼어내야겠어

바람의 시작점을 찾아가는 돌멩이를 따라가야겠어

누아르 음악으로 점심 준비를 차렸어

검은 치장으로 순백을 가려두면 사람들은 금방 알아 채

휘발유를 태우고 안정을 찾아야겠다

마을회관 사이렌을 개들이 따라 울부짖는 이명증에 동참하는 중이야

초우량 나무의 데이터를 나무 아래에서 복제하고

수벌은 독침도 없고 꿀도 못 따니까 쫓겨나기라도 하지 암벌은 너무 먼 곳의 꽃을 찾아야 하고

집을 떠나 빈 방을 찾는 여행이라니까

신발을 새 것으로 바꾸려 하면 우선적으로 몰아치는 상품의 순서가 한 둘이 아니라서

조수석에 앉아 후방거울 속 춤추는 억새들의 메마른 부드러움을 슬퍼하였다

작은 배낭을 등에 지고 빈 것에 가벼움을 느끼자

걸어둔 외투에 강박증일까 성공사례 책에 시달릴까

빈들의 발자국들은 달아난 흔적입니다

악역의 주인공이 잡히지 않는 영화 시리즈나 연속극은 왜 없는가

수치와 통계와 실용성의 냇물을 읽었던 빗속이라니깐요

폭식과 거식의 거울을 번갈아봅니다

오백 년 수령 당산나무에 물 한 잔과 경배를 하는 살풀이

내가 바라보는 하늘을 해석해주는 물거울에게도 경배를

나를 당신 언어로 상담하신다고요?

나는 언제나 적절하지 않습니다

낮달이 개밥그릇처럼 깨끗하여 내 밝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며칠 흐리다 한 동안 연장하겠습니다

희고 파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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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뤼미나시옹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예술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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