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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an 27. 2022

아이 엠 댓

마하라지


> 그의 안에 모든 존재들이 살고, 그 또한 존재들 안에 살아 있는 자. 모든 것에 은총을 주는 자. 우주의 지고한 영인 무한한 존재 ---내가 그것이다. ( I AM THAT) 


>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내가 있다' 안에 머무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체험할 수는 있는 어떤 상태로 들어간다. 애쓰고 또 애쓰는 것이 그대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


> '내가 있다'는 느낌은 항상 그대에게 있지만, 그대가 그 위에 육신, 생각, 관념, 소유물 등 온갖 것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동일시가 그대를 오도하며, 그 때문에 그대는 자기 아닌 것을 자신으로 착각한다.


> 그대는 자각할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 없이는 어떤 지각이나 상상도 있을 수 없다.


> "그것'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니까. 만약 그대가 기회를 주면, 그것이 그대를 얻을 것이다. 비실재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라. 그러면 실재가 신속히 그리고 유유히 그대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것이다.


> 그대의 삶과 똑같이, 내 삶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다만 나는 초연하며, 지나가는 연극을 연극으로 보지만, 그대는 사물들에 집착하고 사물들과 함께 어울린다.


> 그대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대의 마음은 사물, 사람, 아니면 관념들에 가있어서, 한번도 그대 자신과 함께 있지 않다. 그대 자신을 주의의 초점 안으로 들여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라.


> 그대 아닌 것을 알면, 그대 자신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은 거부와 배제를 통해서이다.


>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삶과 더불어 흐르기를 거부하고 강기슭에 들러붙을 때이다.


> 욕망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현실의 일을 일어나는 즉시 관찰하라. 왜냐하면 그대는 일어나는 그 일이 아니라,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즐거움의 순간들은 고통의 흐름 속에 있는 틈새일 뿐이다. 그러니 마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 전체와 관련해서 보면 모두가 완전하다. 단지 고립시켜 볼 때만 결함이 있고, 그래서 고통이 있는 자리가 된다. 고립을 조장하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본성상 나누고 대립시킨다. 


> 마음은 심연을 만들어내지만, 가슴은 심연을 건너간다.


> 인과성은 시간이라는 환상 때문에 생겨난다. 과거와 미래를 무시간의 '지금' 안에 있는 공통 유형의 부분들로 보면, 원인-결과의 관념은 타당성을 잃고, 창조적 자유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 실재하는 세계는 마음의 범위를 넘어서 있지만, 우리는 욕망이라는 그물을 통해 세계를 본다.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그 그물을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그물이니까.


>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은 특정한 한 육신이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변화이다. 통합이 끝나고 해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태어날 때 육신의 '아는 자'가 나타나듯이, 죽을 때는 '아는 자'가 사라진다. [그러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까?] 생명Life은 남는다. 의식이 형상을 나투려면 탈(乘) 것과 도구가 필요하다. 생명이 다른 육신을 산출하면, 다른 '아는 자'가 생겨난다.


> 죽음으로는 육신만 죽는다. '생명'과 '의식'과 '실재'는 죽지 않는다.


>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태어나지 않은 것만이 죽지 않는다. 결코 잠들지 않고, 깨어나지도 않는 그것, 그것의 희미한 반사가 '나' 라는 느낌인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라. [그것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온 마음을 거기에 집중하라. 관심이 있어야 하고, 꾸준히 기억해야 한다.


>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의 종이고, 우리가 아는 것의 주인이다.


> 의식이 깨어나면 무의식은 해소되고, 무의식이 해소되면 에너지가 나오고, 마음은 제 자리가 잡혀 고요해진다. 마음이 고요할 때, 우리는 자신이 순수한 '주시자'임을 안다.


> 순수한 존재 안에서 의식이 일어나고, 의식 안에서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 모든 시작의 앞에, 모든 끝의 뒤에 '내가 있다' ( I AM )


> 마음이 있는 한, 육신과 세계가 있다. 그대의 세계는 마음이 만든 것으로, 마음 안에 둘러싸여 있고, 여러 조각이 나 있고, 찰나적이고, 개인적이며, 기억이라는 살에 매달려 있다.


> 의식의 초점을 마음 너머로 옮기는 것이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 한 생각, 즉 '내가 있다'는 생각 외에 모든 생각을 거부하라. 처음에는 마음이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마음이 항복하고 침묵할 것이다.


> 그대의 삶을 그냥 일이 다가오는 대로 살아가되,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지켜보라. 모든 것은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게 하고, 삶이 안겨주는 대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라. 이것이 하나의 길이다. 


> 행복은 진아에서 오며, 진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 요동하는 것은 근대의 진정한 존재가 아니다. 다만 마음 안에서 그것이 반사될 때 요동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 진아는 마음을 넘어서 있고, 움직임과 동요, 쾌락과 고통을 자각하고 있지만, 상관하지는 않는다.


> 그대는 지금, 여기서 진아이다. 마음은 내버려두고, 자각하면서, 상관하지 말고 서 있어라. 그러면 그대는 사건들이 오고 가는 것을 초연하게 지켜보는 것이 그대의 진정한 성품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영구성이란 시간의 작용에서 생겨난 관념일 뿐이다. 그런데 시간은 기억에 의존한다. 그대가 영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는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의미한다. 그대는 마음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 마음의 평안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 만일 평안을 원한다면, 그것을 얻을 만한 자격을 갖추라.


> 침묵하고 깨어 있으면서 그대의 진정한 성품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한 일의 전부이다. 이것이 평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 우주가 그대에게 다가와서, 그대가 자신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를 일부분으로 포함하는 하나의 전체성을 만들어 낸 것은 그대 자신이다.


> 지각, 상상, 기대, 예상, 환상, 이 모든 것이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


> 자신을 넘어서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아닌 것들을 알게 되면, 그대는 거기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적 상태 안에 머무르게 된다. 그것은 아주 자발적으로, 그리고 애씀 없이 되는 일이다.


> 그대는 의식을 비추는 순수한 자각이며, 그것의 무한한 내용이다. 이것을 깨닫고 그에 따라 살아가라.


> 내면으로 들어가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탐구하거나, 아니면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인 '내가 있다'에 마음을 집중하라.


> 그대 자신을 알라, 그러면 나머지는 모두 그에 따라 온다.


> 그대 자신, 특히 그대의 마음을 순간순간 지켜보라. 이러한 '주시하기'는 자기를 자기 아닌 것에서 떼어놓는 데 필수적이다.


> 나에게는 생시, 꿈, 잠의 세 가지 상태를 포함하면서도, 그것들을 초월하는 단 한 가지 존재 상태만이 있다. (Turiya)


> 세계는 나의 안에 있고, 세계가 나 자신이다.


> 자각(awareness)은 원초적이다. 그것은 원래의 상태이며, 시작도 끝도 없고, 원인도 지지물도 없고, 부분도 변화도 없다. 그에 반해 의식(consciousness)은 접촉에 의해 존재하고, 하나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반사이며, 이원성의 한 상태이다. 자각 없이는 어떤 의식도 있을 수 없지만, 의식 없이도 자각은 있을 수 있다.


> 깨달음이란 무지의 상대물일 뿐이다.


> '내가 있다'는 생각은 거울을 닦아내는 천이다. 그것을 사용하라.


> 장신구에서 이름과 형상을 제거하고 나면 금이 드러난다. 이름과 형상에서 벗어나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욕망과 공포에서 벗어나라.


> 삶과 죽음이 하나의 존재가 가진 양 측면으로서 서로에게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이 불멸성이다. 시작 안에서 끝을 보고, 끝 안에서 시작을 보는 것은 영원성을 암시한다. 불멸성은 결코 연속성이 아니다. 변화의 과정만이 연속되며, 어떤 것도 지속되지 않는다.


> 자각은 시간의 것이 아니다. 시간은 의식 안에서만 존재한다. 의식을 넘어선 시간과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 깨달음은 욕망과 공포, 그릇된 관념이라는 형태의 장애물들을 영구히 제거함으로써, 고귀한 덕을 쉽고 자발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 나도 이따금 예전의 감정적, 심리적인 반응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지만, 나는 즉시 그것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다.


>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미 죽어 있다. 나는 이중의 의미에서 죽어 있다. 내 몸에 대해 죽어 있으며, 내 마음에 대해서도 죽어 있다.


> 사람이란 실재의 한 그림자일 뿐 실재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초조해 하거나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내면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데 동의한다면, 삶은 미지의 것을 향한 여행이 된다.


> 그대의 마음은 세계 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나의 마음은 실재 안에 맞추어져 있다.


> 우주는 제 스스로 일을 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 외에 내가 무엇을 알 필요가 있겠는가.


> 뚫린 구멍이 종이 안에 있으면서도 종이에 속하지 않듯이, 의식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의식을 넘어서는 지고의 상태도 그와 같다. 그것은 마치 마음 안에 뚫린 하나의 구멍과 같은데, 그 구멍을 통해 마음은 빛에 휩싸인다. 


> 내가 있기 때문에 세계가 있지만, 나는 세계가 아니다.


> '그것'은 지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 있다.


> '그것'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되는 것이다. 마음은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


> 실재로는 어떤 한 사람은 없고, 단지 기억과 습관의 끈들만 있다. 깨달음의 순간에는 사람이 사라진다.


> 실재하는 것은 이름과 형상이 없는 순수한 생명의 에너지며 의식의 빛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그대는 실재의 깊은 침묵 안에 감겨 평안을 맛볼 것이다.


> 모든 이름과 형상을 놓아버렸을 때, 실재가 그대와 함께 한다. 그것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 그대가 일단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과성에 지배되는 세계를 창조하고 나면, 자연히 모든 것의 원인을 탐색하고 추구하게 된다. 그대는 질문을 던져 놓고 답변을 강제하는 것이다.


> 하나의 장식품을 녹여서 다른 것을 만들지만, 두 장식품 사이에는 아무런 인관관계가 없다. 공통인자는 금속일 뿐이다.


> 인과성에 대해 왜 그리 걱정하는가? 사물들 자체가 무상한데, 원인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오는 것은 오게 내버려두고, 가는 것은 내버려두라.


> 빛만이 존재하고, 빛이 전부이다. 모든 것은 그 빛으로 만들어진 그림에 불과하다. 삶과 죽음, 아와 비아, 이런 모든 관념들을 내버려라.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


> 모든 것은 그대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데서 생겨난다. 그대는 화막(scteen) 위의 화상에 실재성을 부여하고 나서, 화면 속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고생하며 그들을 구해내려고 애쓴다. 아니다. 먼저 그대 자신과 씨름해야 한다. 다른 방도가 없다. 


> 실재를 겉모습으로 착각하는 것은 통탄할 만한 죄이며, 모든 재앙의 원인이다.


> 수천 명이 죽어가는 데도, 그대는 한 사람을 구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지구상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이다.


> 그대는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지만, 그대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 그대는 그대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 완전히 감싸여져 있다.


> 그대는 본래의 그대를 망각하여 세계 속으로 들어갔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면 거기서 나오게 될 것이다.


> 그대가 세계에서 벗어날 때, 세계에 대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그대가 세계의 한 죄인인 동안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 실재하지 않는 것은 상상된 것이다.


> 그대는 기억에 어떤 누락이 있을 때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의식밖에 없다. 모든 생명은 의식하며, 모든 의식은 살아 있다.


> 사랑이란 하나의 복합체이며, 그 자체로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음의 그림자, 기억들의 합계에 지나지 않는다.


> 순수한 존재가 마음이라는 거울 안에서 앎(knowing- 아는 성품)으로서 반사된다. 이때 '알려지는 것'이, 기억과 습관에 기초하여 '한 사람' 이라는 형상을 띤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그림자. 마음이라는 화막에 비친 '아는 자'의 한 투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 하탈이란 자아가 '스스로 짊어진' 거짓된 관념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왜 ㄱ대는 '체험'에서부터 '체험하는 자'로 돌아서서,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마디 말, 즉 '내가 있다'의 완전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가.


> 그저 마음속에 '내가 있다' 는 느낌을 간직하고, 그대의 마음과 느낌이 하나가 될 때까지 그 안에 합일하라.


> 어떤 것을 갈망하는 상태는 더욱 깊은 체험을 가로막는다.


>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말고, 마음을 넘어가라.


> 원하거나 생각하거나 행하는 그 어떤 것에도 개의치 말고, '내가 있다'는 느낌 안에 머물면서, '내가 있다'가 마음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라. 온갖 체험들이 다가올 수 있지만,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무상하며, '내가 있다' 만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고, 동요됨이 없이 존재하라.


> 아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To know is to be)


> 거짓을 거짓으로 보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늘 해 나가야 한다.


> 그대 자신을 '내가 있디'는 자각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라. 이것은 모든 수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 빛이 필름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름이 빛을 물들이고 가로챔으로써, 빛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 영원자를 깨닫는 것은 영원자가 되는 것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전체 우주가 되는 것이다.


> 그대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대가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라.


> 의존하는 것은 무엇이든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 한 줄기 빛은 먼저 알갱이에 방해받지 않으면 보이지 않듯이, 지고자도 일체를 알려지게 하지만 그 자체는 알려지지 않는다.


> 해탈이란 자신이 태어남과 죽음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괴로움을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행복을 탐구하는 것이 더 낫다.


> '나는 무엇인가' 하는 한 가지 질문 외에 모든 질문을 포기하라. 결국 그대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그대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확실하다.


> 지구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은 반드시 낯과 밤을 경험한다. 그러나 해와 함께 머무는 사람은 어둠을 모른다.


> 배우는 사람들의 잘못은, 내적인 자아를 잡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지각 가능한 모든 것은 무상하며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지각을 가능케 하는 것만이 실재한다.


> 충만함과 비어 있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실재는 그것들을 넘어서 있다.


> 나의 세계는 실재하는 반면, 그대의 세계는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대의 오류는 자신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대는 결코 태어나지 않았으며, 결국 죽지도 않을 것이다.


> 구원받는다는 것은 환을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 그대는 사건들과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며, 사건 자체가 아니다.


> 자신에 대한 사랑을 진아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라. 그러면 세계라는 그림이 바뀌게 될 것이다.


> 이름과 형상들에 대한 집착은 두려움을 야기한다. 나는 어떤 집착도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나는 화를 내면서 방안을 서성거릴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의 실체가 지헤와 사랑의 중심이며 순수한 존재의 원자인 것을 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가라앉고, 마음은 침묵속으로 합일된다.


> 그대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일하지도 말라. 일 자체를 위해서 일하라.


> 마으을 '내가 있다'i am에, 즉 존재의 느낌에 고정하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I am so -and-so)가 해소 된다. 그러면 '나는 주시자이다'가 남게 되고, 그것도 '나는 모든 것이다' 안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나와 별개가 아닐 것이다


> 모두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나 자신에게서 모두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사랑이다.


> 왜 그대는 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에 안달하면서 매일 죽어가는 수백만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가? 전 우주들이 매순간 안팎으로 폭발하고 있다. 내가 거기에 대해 울어야 하겠는가?


> 나는 '주시자'로서 그 안에 있지만, 나는 존재(Being)로서 그 너머에 있다.


> 모든 꿈들의 뿌리에는 자기 망각 즉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가 깔려 있다.


> 의식과 무의식은 한 생명의 두 가지 측면이다. '자기 잊기'는 '자기 알기' 안에 내재하고 있다.


> '내가 있다'를 捉把 착파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하라. 이것이 수행이다. 깨달음 속에 서는 착파할 것도 放下(방하) 할 것도 없다. 일체가 알려지며, 아무 것도 기억되지 않는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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