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

by 일뤼미나시옹


비애

-김정용



비애, 아직도 미닫이문을 열면 비닐장판에 카시미론 홑이불의 미열 두 손을 넣고 남루한 저녁 빛의 방문을 기다리는가.


오늘도 광고 전단지를 돌리며 얼굴은 까매지고 연립주택 현관에 한 장, 한설 바람에게도 한 장, 기름 뜬 고인 물에도 한 장, 아이가 메고 가는 가방에도 한 장, 발목이 시큰거리고서야 초식을 끝낸 동물처럼 먼 거처의 저녁 깊이에 잠겨가는지.


비애, 여태껏 합판에 못을 빼거나 시멘트를 이개고 구름의 흠결을 메워주고 삐걱거리는 구름을 다독이고 비를 기다리는 구름에게 비구름 꿰매어 주고 조기 퇴근의 비를 내심 기다리며 탈지분유 가득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지.


내 마음결에는 오일장 시장통의 젓갈 파는 여자, 수박의 겉을 읽어서 속내를 말해주는 여자, 아마빛 이마를 하고 명태의 내장을 긁어내는 여자로 오는가. 그것도 모자라 달의 밤 절집에 들어가 탑돌이를 하고 막걸리를 석불에 뿌리는 달빛으로 돌아가는가.


우린 결속도 없이 낯선 복사꽃으로 알아보았고, 결속도 없이 아린 손톱 밑을 알게 되었고, 결속도 없이 일곱 살에 훔친 파란 사과의 입 맛을 아직도 갖고 있었고, 아직도 아프면 아삭아삭 푸른 살점의 사과를 씹어야 하늘 입 맛을 되찾고 있는가. 아삭 거리는 식감의 날이 아프게 씹히는 비애의 너인가.


비애, 아직도 반짝이 걸음을 하는 큰 집 곁 시냇물에 머물고 있는지. 깊이가 없어서 범람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멀리 설경을 향해 몸을 씻고 나신의 하루를 내어주는지.


어린것들이 벌써부터 자맥질을 하고, 물마루 근처 잔물결 앞가슴으로 헤치며, 폴짝 물 안으로 들어가 민물새우나 바둥거리는 어린 물고기를 입에 물 때, 비애는 자동차 앞 유리 햇살에 시린 발을 넣고 비곗살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덥히는가.


어린것들은 벌써부터 수 십 번 자맥질을 하고 헉헉거리고 물살의 연속은 어린것들을 지레 늙어지게 하고 어린것들에게 논다 먹는다 힘들다, 는 물이 안고 있는 숨결의 하나라는 걸 못 느끼고 벌써부터 밑바닥에 닿는 생체험을, 비애여 더운 발을 가지고 보고 있기라도 하는지.


비애여, 아직도 내 동경의 바다 앞에 보퉁이 같은 마음을 안고 어둑어둑하고 있는지, 그 바다는 보퉁이를 풀어보려 앞가슴을 몇 번이나 헤쳤는지 그 손을 너는 또 몇 번이 탈치고 앉았는지, 내가 안은 이 해 질 녘의 아린 마음이 여태껏 그러고 있는 비애의 속내인지.

keyword
일뤼미나시옹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예술가 프로필
팔로워 3,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