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은 두고

by 일뤼미나시옹



라일락은 두고

김정용


가는 봄이여, 라일락은 두고 가거라

비닐 샌들이 쓰레기 소각 더미에 던져질 때, 옛사랑

라일락은 슬리퍼 타는 냄새로 각인된 것인가.


가는 봄이여, 폐교의 유리창 돌에 맞은 구멍마다 라일락은 관통하여라.

올가미에 걸려 아사하고 살점과 내장 안구까지 까마귀 떼에게 내어주고 하얀 윗니를 드러낸 채 풍장 중인 고라니의 사라진 콧잔등에도 라일락 향기 한 줌을.


그러고 보니 너는 참 나를 닮아 콧잔등이 이쁘다 했는가

컨테이너 막사에서 잠자고 맞은편 공장에서 토요일 늦은 시간까지 망치질하는 퇴근길이 없는 깡마른 이국의 청년에게 손아귀 힘을 푸는 틈에 콧잔등 간지럽힌 재치기를 던져주고 가거라.


영원한, 그러나 다시금 영원한 반복의 이해를 사랑은 주지 않으니

영원한, 그러나 다시금 반복의 이해를 우리는 사랑으로 또 살게 될 것이다.


라일락이라는 발음은 전기가 흐르는 우리 연애의 피부에 그것이라면

처마 밑 그늘에 버려진 화분은 바람에 넘어지고 몇 해 동안 자갈 땅에 실뿌리 내리느라 봄 근육을 다 써버렸으니, 이것은 라일락 살해의 기록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네가 던진 빈약한 번역물이 한 주간 공기를 배회할 때

슬리퍼를 끈 늦은 산책에서 다만 담장에 기댄 하루치의 그늘은

희석될 기미 없는 농도를 가지고 옛사랑의 공터에 비닐 타는 냄새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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