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가에서

창가에서 / 파스텔의 이유

2013.6.16

by 일뤼미나시옹





파스텔은 윤곽만 있고 형태를 감춘다. 파스텔은 따뜻한 숨김이다. 고달픈 육체를 감싸주고 아픔을 공기 속에 품게 한다. 파스텔은 은은한 향기가 아니다 파스텔은 납이 녹는 공기맛이 난다. 파스텔은 피어난 꽃의 이야기가 아니다 피고 난 후의 지고 있는 시간의 덩어리다. 파스텔은 날개를 펴는 춤이 아니다. 파스텔은 춤을 포기하고 싶은 날개이다. 파스텔은 낡은 온후다. 염려스러운 일상에서 밀려난 온후다. 밝은 대기에 비추는 누추한 온후다. 별에게 말하지 말자. 나무 그늘에 숨겨두었다 말하지 말자. 파스텔은 발설의 이유가 아니다. 파스텔은 구릿빛 노을에 지친 몸그늘이다. 아늑한 기울어짐에 드러나는 지친 날갯짓이다. 파스텔은 풀섶에 죽은 나비의 날개가루다. 장례를 마치고 봄바람에 뿌린 사촌막내형은 뼛가루다. 파스텔은 늦가을의 햇살가루다. 몸의 부식이다. 밥벌이를 춤을 추구 난 후의 부식이다. 슬픈 술집에 눅눅한 테이블의 질감이다. 찌개를 비운 냄비 밑바닥이다. 너를 몇 번이나 그렇게 꿈꾸었는지. 말을 건네면 네 얼굴에 번지는 파스텔 표정. 외면당한 말의 뉘앙스인 파스텔. 등에 네 윤곽을 문신해야겠다. 네 심장의 윤곽을 문신해 보아야겠다. 그날의 온기와 흐림에 따라 겪게 되는 네 윤곽의 무게를 납물처럼 새겨야겠다. 형태는 윤곽 속에 속엣말을 숨기고 맑은 공기에 한 줌의 흙먼지가 불러일으키는 깨어남. 파스텔은 그날의 빈 틈에 채워진 비워지지 않는 기다림이다. 해질 무렵에 몸은 공기 속에서 뒤척인다. 인식은 없었고 몽상은 기억에 새겨지지 않으며, 백로의 우울은 무논에서의 몽상 거울이다. 파스텔은 수은 같은 어느 하루의 기록이다. 삶에는 간혹 흐려지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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