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 도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어 고름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 우선 너의 오랜 친구인 식물에게 가서, 빗물이 파놓은 물길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비가 씨앗들을 멀리까지 운반해 갔음에 틀림없다. 그 물길들을 따라가 보면 너는 흐름이 펼쳐지는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방향을 따라 너의 식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식물을 찾아라. 거기 두 식물들 사이에서 자라는 악마의 잡초들(devil, s weed planrs)이 네 것이다. 나중에 이 마지막 식물들이 자기 씨를 퍼트릴 것이기에 너는 이 식물들 각각에서 시작해서 물길을 따라가며 너의 영토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은 "변형되는 다양체"들 만큼이나 많은 도주선들을 끊임없이 흘려보내왔다. 결국 자신을 구조화하거나 나무 형태로 만드는 음악 고유의 코드들을 뒤엎어버리게 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음악 형식은 단절되고 증식한다는 점에서도 잡초나 리좀에 발견될 수 있다. <I서론: 리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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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근처에 있는 보건대학교 도서관에서였다.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고선 바로 도서관에서 이 책을 펼쳤다. 인생의 새로운 국면이 필요했다. 전복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그것은 의미의 발현이나 발견 혹은 도출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 혹은 누수 같은 것이었다. 책을 펼쳤고 책에 대한 얕은 지식을 참고 읽었을 때 그 당황스러움, 낯설고 이해불가능한 문장과 단어들, 새로운 개념의 용어들, 그러나 불가해한 문장들의 밑바닥에 드러나는 이색적이고 약간의 도취적인 흐름. 내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 물에 휩쓸려가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흘려 가고 있다는 느낌. 책이 구현하는 것에서 새로운 가치의 전도.
리좀은 뿌리 식물들을 말한다. 뿌리 식물들은 중심이 없다. 중심이 없다는 것은 구조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태어난 장소에 구조화된 삶을 산다.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심지어는 집단무의식에까지 구조화된 삶을 산다. 그리고 의미의 중심축에 끌려 삶을 살아간다. 원하지 않았다는 삶의 의미가 진정한 하나의 가치가 된다. 돈을 벌어라, 공부를 하라, 출세를 하라, 흰색을 사랑하라, 검은 것은 악이다. 달보다는 태양을 숭배하라 등등.... 이러한 의미, 중심이 있는 나무뿌리의 삶은 종적 삶이 된다. 종적인 것은 뿌리, 중심을 가진 삶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에서 탈코드와 즉 달아나라는 말이다. 중심을 버리고 코드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글쓰기를 할 때의 그 즉각적인 발현, 문장의 구현은 중심을 가진 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리좀의 방식이다는 말이다. 그것은 음악 같은 것이다. 음악은 중심이 없다. 흘러가는 것은 뿌리식물들의 번식과 같다. 음악을 흐르는 것처럼 글을 읽고 쓰는 것이다. 영토를 넓혀라는 말은 현재성의 갇힌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을 찾아라, 거기로 흘러가라는 말이다. 주저앉아 정주하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흐름이 되라는 것이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고 사막을 달리고 도시를 횡단하라는 말이다. 일상에 이를 적용한다면 나를 구조화하고 있는 가치를 전복하고 다른 불가능성을 찾아가라는 것이다. 새로운 예술을 만나고 예술가가 되고 새로운 책을 만나서 이질적인 것을 체화해 보는 것이다. 뻔한 말들, 뻔한 진실들, 이것이 '진리'다 라고 떠벌리는 가치들을 버리고, 불편하고 이질적인 것을 만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영토를 구축하는 것이며, 거기서도 정주하지 말고 자기를 증식하라는 말이다. 즉 분화해서 다시 새로운 판을 찾아 떠나라는 말이다. 모든 가치의 전복 다음에 회복되는 새로운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