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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Feb 16. 2019

사랑에 대하여

그림: 필립 폰 스캔츠

'사랑' 

이 말은 이미 너무나 많이 사용되어서, 이젠 아무리 '사랑'이라고 외쳐도 도무지 먹혀들지가 않는다.

내 옆 사람에게 너를 사랑해 라고 되뇌어도. 응, 그래. 이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낱말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그 고유성이 빛을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온통 '사랑'이다. 유행가 가사의 거의 전부는 사랑이다. 주말 드라마 아침 드라마 월화 드라마 수목 드라마도 모두 '사랑'이다. 만화도 사랑이고, 애니메이션, 영화도 전부 사랑이다. 미국 영화의 거의 대부분은 가족 중심주의고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도대체 먹혀들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자본화된 세계와 결탁해버린 탓이다. 동일화의 조건 속에 함몰되어버렸기 때문에, 차이 나는 개별성과 변이성의 사랑이 소통되지 않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려면 말에 앞서 다른 것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이 생에 응답하지 않으면, 사랑으로 이 생을 감싸지 않으면, 인생이란 얼마나 쉽게 못으로 긁힌 유리창 같이 전망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는지.... 수 천 권의 책을 읽고, 수 천 페이지 글을 쓰고, 수 백 권의 일기장을 채워도, 사랑으로 나와 너, 우리들, 그들 삶에 응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노회 한 삶을 살아버린 것이며, 너무 빨리 지난한 삶을 거쳐버린 것과 다름 아니다.  동일화의 조건 속에 포획된 사랑은 마치 표준화된 언어로 번역된 문장을 읽는 것과 같다. 살았으나 단 한번 온전히 살았다는 느낌이 나질 않는 삶을 되돌아봄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눈이 단 한 번이라도 별이 되는 날 있었던가.

나는 십자가의 예수의 눈을 고통으로 보지 않고 빛나는 별로 바라본다. 고통의 의미에 별의 찬란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여러 번 눈이 별이 되는 밤을 살아야 한다. 눈에 불이 켜지는 날. 눈에 빛이 한 가득인 날. 나도 모르게 눈이 별이 되는 밤이 있다. 이 세계의 고통에 대해 신적으로 괴로워해 보고, 스스로의 삶을 궁극적으로 관조하고, 아주 작은 풀꽃의 생애 대해 천착해 보아야 한다. 자연은 절대 모순 없는 변화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얼마나 많은 모순을 안고 살게 되는지.. 결점 투썽이의 생을 사랑하려면 눈이 별이 되는 날들이 많아야 한다. 위대한 작가들의 눈은 언제나 별이 되어 있다. 다이아몬드는 거의 대부분 빛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보석의 그 텅 빈 채워짐. 우리 눈이 별이 되려면 자기 사랑의 집착을 버리고 세계에 대한 사랑의 열망으로 채워져야 한다. 얼마나 쉽고 단순한 응답인가. "너를 사랑해" 아니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말. 

수행사의 관점에서 보면 반복적인 말이 수행의 차원이 된다. 매일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반복하다 보면 정말 마음에도 없던 사랑의 감정이 일어난다 한다. 바꿔 말해, " 나는 저놈이 싫어"라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그와 싸움을 언제고 하게 되는 것과 같다. 롤랑 바르트 식으로 다시 사랑을 정의 내려본다면, "난 널 사랑해"라는 말은, '매일매일 우리 다시 시작하자'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즉 사랑은 매일매일 확인해야 하는 '틈'과 같다. 메워지지 않는 틈. 이 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반복해야 한다. 포개짐. 메우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맹세. 

'애무'라는 말은 단순히 살과 살의 만남, 부빔이 아니다. 언어와 언어가 만나는 것도 '애무'이다.

나의 언어와 너의 언어가 교환가치가 아니라, 소통가치로, 애도의 형식으로 주고받을 때 언어는 애무가 된다. '타자의 얼굴은 신비이다' '너의 얼굴은 매일매일 내게 신비이다' '너의 오늘 모습은 어제와 다른 신비이다' '노동하는 너의 얼굴, 그림 그리는 너의 얼굴, 공부하는 너의 얼굴은 신비이다' 내게 찾아오는 이방인의 모습까지 신비이다. 이렇게 우리는 '타자성'을 가지고 '타자'인 너를 매일 환대하며 살아야 한다. 


"당신의 본성은 당신의 이웃이 결정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언어를 다루는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본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조건 어떤 인연에 따라 나는 자유인이 될 수도 있고, 노예가 될 수도 있다. '타자'는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내가 타자에게 나의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타자'가 나의 본성을 형성시킨 것이다. 돌아보라. 나는 누구를 만나는가. 그와 나는 반드시 닮아 있다. 나의 바깥인 타자를 환대함으로써 나와 포개짐으로써 그와 나의 언어에 애무가 일어나는 지점. 바로 그 지점이 진정 닳아버린 '사랑의 언어'가 회복되는 지점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말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너에게 장미꽃을 주고 싶어" 이 한마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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