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피자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 「백야」 중에서
햇살을 아작아작 씹어 먹는 벚나무가 있었다. 햇살이 어찌나 좋은지 온 몸으로 햇살 받아먹어 환각에 빠진 벚나무가 있었다. 초등학생 둘이서 편의점 앞에 내놓은 파라솔 테이블 위에서 감자 칩을 씹으며 실로폰을 띵땅 띵땅 치고 있다. 어찌나 소리가 맑은지 내 몸이 환해지네. 그 소리 얼마나 순순한지. 벚나무처럼 나는 환(幻) 하였다. 지상의 근심 걱정을 잊게 하는 순은의 환각. 띵땅 띵땅 실로폰이나 두들기며 보내는 봄날 오후의 나른함. 어찌 쫓아낼 수 있으리. 은빛의 시냇물 같은 실로폰 소리 따라 소풍이나 갈까. 머리에 꽃을 단 幻에 빠져 치아를 드러내며 幻해 졌으면. 지금 지상의 벚나무들이 일제히 幻해지듯, 순은의 실로폰 소리에 지금까지 살아온 생이 통째 幻해.
(In Pas(s)ing/Mick Goodrick/ECM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문자 메시지의 답을 하지 않는다. 집에 가지 않는다. 詩를 읽지 않는다. 자코 페스트리우스를 듣지 않는다. 콜트레인을 듣지 않는다. 알디 메올라를 듣지 않는다. 빌 에반스를 듣지 않는다. 피츠제랄드를 듣지 않는다. 허비 행콕을 듣지 않는다. 심야의 고양이 울음소리만 듣는다. 개척 교회 담벼락 아래서 우는 고양이 새끼 울음소리만 듣는다. 더 이상 다른 삶은 없다. 삶 자체가 이미 의미라는 것. 여기서 더 이상 다른 삶은 없다. 소나기를 만나 푹 젖은 교복 입은 아이들을 만나고, 전심전력으로 피었다 지는 봄꽃 앞에서 나도 어쩔 수 없다. 떨어지지 말라고 손사레를 치며 말릴 수 없다. 이 삶을 나는 믿어야 한다. 이 환장할 삶을. 나는 전적으로 믿는다. 삶의 바깥에도 여전히 삶뿐이라는 사실. 이 삶의 다른 쪽을 보아도 여전히 환장할 삶뿐이라는 사실.
< Denman Maroney / Michael Lytle / Robert Dick - Acoustic Frontiers #1>
육천 원 내면 한도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고기 뷔페집. 자기 손으로 덜어서 구워 먹는 고기 뷔페집. 일요일 오후 길게 줄지어선 사람들. 어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고기 냄새에 몸이 안달 나는 사람들. 몸을 환장하게 만드는 고기 냄새. 천정 가득한 환풍기로 빠져 나가는 고기 냄새. 어찌 이다지도 먹을 게 없단 말인가. 고기 밖에는 이다지도 먹을 수 없는 것들뿐이란 말인가. 어찌 이다지도 고기 냄새가 좋단 말인가. 등산하고 내려와서 배불리 먹어치우는 고기. 고기를 먹기 위해 산에 가고, 고기를 먹기 위해 아침밥을 거르고. 봄 산 아랫배에 기름덩이 가득 채우고 문을 나서는 중년들이여 허벅진 살덩어리들이여. 언젠간 우리를 받아먹을 봄 산이 우리를 군침 흘리며 바라보고 있다. 우리를 받아먹고 꽃피우려고 바라보고 있다. 어디에다 중년의 이 고깃덩어리를 바칠 것인가. 늙어서 질겨빠진 고깃살을.( KING CRIMSON SONGBOOK/Crimson Jazz Trio)
新村 부근
―사이 토우 마리코
사람을 경멸하면
가슴에 시큼한 꽃이 피고
하룻밤 자도 그것이 안 시들 때
햇님이 녹색으로 보인다
저 산 가서 이 꽃을 도려내
매장하고 싶다
약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아침의 통근시간 학교도 회사도 빠지고
저 산으로, 약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하지만 이 좁은 길 하나를 건너갈 수 없다
( Tati/Enrico Rava/ECM )
새벽. 한 남자가 인도의 은행나무 둥치를 껴안고 울고 있다. 얼마나 울어대는지, 은행나무는 축 처진 남자를 부축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전적으로 매달려 우는 몸을 견디는 은행나무가 부축 받아야 할 처지, 겨우내 살이 따 빠진 은행나무 봄물이 올라도 살이 붙지 않는 은행나무. 어쩌자고 이리로 끌려와서 붙박였는지. 정차한 빨간 승용차 안 윤곽이 흐릿한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어도 저 남자 쪽팔리지도 않나, 어쩌자고 저리 펑펑 잘도 우나. 나도 가을나무 잎 떨쳐내듯 잘 울지만 저 남자 정말 쪽팔리지도 않나, 승용차는 중앙선 넘어 돌아가고, 은행나무 밑둥치에 남자 망연하게 주저앉는다. 이젠 좀 쪽 팔릴거다 나무한테, 비쩍 마른 몸으로 봄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나무한테 좀 쪽 팔릴거다. 그래도 그 남자 우는 동안 나무와 남자는 서로 잘 어울렸다 새로 사귄 커플처럼.(Open Range/Kevin Hays/ACT)
다시 가난한 방으로 돌아온다. 바깥이란 무엇인가? 바깥이란 ‘상처 주고’ ‘상처 받는’ 말의 세계 아닌가. 이 가난한 방은 그러니까 내가 바깥에서 도망칠 유일한 곳이다. 이 가난한 방은 나의 ‘성소’이자 ‘말이 필요 없는’ 곳이다. 내 몸은 여기서 휴식하고 여기서 바깥에서 얻은 상처를 핥는다. 그리고 말없이 저 바깥을 용서한다. 내게 상처 준 바깥을. 그래, 나는 이 가난한 방에서, 축축이 젖는 눈을 가진다. 바깥에서도 축축이 젖은 눈을 가지길 희망 한다.이 가난한 방에서 나는 입술을 닫는다. 마음에 푸른 등불을 하나 켠다. 누렇게 바랜 책처럼 벽에 기댄다. 두 손을 천천히 편다. 손에 묻은 바깥의 기억을 얼굴에 문지른다.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살고 있는 존재들과, 이 세상 한 모퉁이에서 죽어가는 존재들과, 이 세상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는 존재들을 생각한다. 달에게로 가는 새들을 생각한다. 연녹색 이파리를 제 몸에서 게워내고 우두커니 서있는 나무를 생각한다. 햇살 받아먹어 몸이 기쁜 존재들을 생각한다. 달에게로 가서 달의 나무가 될 수는 없지만, 해에게로 가서 해의 나무가 될 수는 없지만, 이 가난한 방에서 나는 꿈꾼다. 바깥에서 발설할 수 없는 언어를 내 안에서 키우고, 갈망하고, 잉태하길. 돌이 뜨거워지는 여름 곧 온다.(To The West/Oriental Express Vol.1)
https://orientalexpress.bandcamp.com/album/to-the-west
어느 조용한 날. 말없이. 가만히. 들어보라. 그의 기타를. 오래된 담벼락의 흙이 봄볕에 녹아 흘러내리는 듯 한 기타 소리를. 그리고 또 들어보라. 한 없이 투명해서 슬픔이, 뜨거운 슬픔이 끓어오르는 것을. 어느 조용한 날에. 당신 혼자 들어보라. 무엇인가 희망하고 싶을 때.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기도를 원할 때. 들어보라. 기타 하나로 한 인간의 삶의 전부를 말해 주는 것을 들어보라. 어느 비 오는 날. 미쳐버리고 싶을 때. 비가 와서 미쳐버릴 것 같을 때, 비가 와서 바깥을 싸돌아다니고 싶을 때, 그때 그의 기타를 들어보라. 당신 옆에 누군가 손을 내밀고 당신의 손을 잡아 주는 듯한 기타 소리를. 비가 흘러내리는 유리창을 보면서 울고 싶을 때, 괜히 눈물이 흘러내릴 때. 자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너무 많은 슬픔이 보일 때. 그의 기타를 들어보라. 봄꽃이 모두 져서 슬플 때, 봄꽃 하나에 의지한 마음에 여름이 찾아와 뒤숭숭할 때. 그의 기타를 들어보라. 낮게 귓전에 다가와 뭐라고 말하는지 기타 소리에 귀기울여보라. 쏟아지는 햇빛에 눈부셔하며 웅크린 몸으로 잠자는 고양이가 되어 들어보라. 소리가 때로 얼마나 찬란한지. 눈부시게 들리는 소리를. 당신이 잠자고 있는 사이에 수많은 새들이 밤하늘을 가르고, 수많은 꽃들이 비명을 지르고 떨어지고, 수많은 잎들이 새로 돋아나듯. 그가 들려주는 기타 소리를 온 몸에 칭칭 감고 하루 종일 있어보라. 낮게 숨죽이면서, 키 낮은 야생화처럼 흔들리고 위태롭게 들어보라. 마음에 폭풍이 일어나려 할 때. 心身이 古宅처럼 되고 싶을 때. 가만히 그의 기타를 들어보라.(One Quiet Night/Pat Metheny/Warner)
사월의 나무 아래에 앉는다. 나무 아래에 앉아 나는 초록의 나무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젖는다. 내게 침묵을 주는 소리. 소리가 만들어내는 침묵. 나무 아래 앉아 생각한다. 죽음 직전에 나를, 죽음 직전에 내가 만나는 소리는 무엇인가. 죽음 직전에 나는 누구를 생각할까. 사월의 나무 아래에 앉아 나무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갓 태어난 소리를. 갓 태어나자마자 내 안의 침묵으로 녹아버린 소리를. 연초록의 잎잎이 푸르르, 풀어내는 소리를 나는 바다처럼 펼쳐져 듣는다. 그래,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가 죽음 직전에 만날 소리를, 죽음 직전에 떠올릴 얼굴을, 죽음 직전에 떠올릴 어떤 시의 한 구절을. 사월의 나무 아래 앉은 나는 바다처럼 풀어진다. 너무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바다. 어떤 결말에 다다른 바다. 돌을 껴안고 있는 바다.(미래의 기억/강은일)
플로베르는 쓸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의자에 몸을 내던졌다고 한다. 이것을 그는 ‘소금물에 절이기(marinade)’라 불렀다. 무엇인가가 지나치게 격렬하게 울리면, 그것은 내 몸속에서 대소동을 일으켜 나는 모든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워 아무 저항 없이 ‘내적인 폭풍우’에 몸을 내맡긴다. 자신에게서 모든 이미지를 비우는 선종의 수도승과는 달리, 나는 이미지로 채워지는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며 그 쓰디쓴 맛을 끝까지 느끼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그 나름의 몸짓을, 코드화된 몸짓을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 우울증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울림이 약화되어 단지 울적한 권태감 같은 것에 자리를 내주려면, 어느 순간 이 몸짓(공허한)을 다른 몸짓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금방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든가 하는 따위). 침대(낮 동안의)는 상상계의 장소이며, 책상은 거기 무엇을 하든 또 다시 현실이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No Waiting/Derek Bailey/Potla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