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런데도 저녁 7시만 넘으면 깊게 파낸 갯벌흙 같은 진한 밤이 여전합니다. 그 밤길로 들고 나는데 또 여전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아파트 입구에 세워 둔, 우리 집 거실에서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입니다.
어둑한 갯벌에 총총히 박힌 수많은 조개처럼 빨강, 초록, 노랑, 하양, 보라, 파랑, 연두의 불빛들이 그러는 듯합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로부터 이어지잖아요. 그 덕에 나름 잘 나가던, 그때의 기쁨, 설렘, 환희. 웅장했던 아름다운 기억, 추억의 힘으로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맞아요. 우리는 크리스마스보다 트리를 만들면서 기다리는 마음이 더 좋았지요. 크리스마스가 끝나고도 트리를 냉큼 걷어내지 않는 추억의 마음이 더 좋지요. 그렇게 여전한 크리스마스 길로 들어오고 나가면서 미소가 떠오르는 이유인가 봅니다.
리자 부인의 미소, 반가사유상의 미소, 아르카익의 미소. 인간 앞에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수많은 신들을 거부하는 미소들을 일부러 따라 배울 수 있는 용기, 트리가 가져다준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감사의 만족감을 타이밍 적절하게 미소로 표현하는 것만큼 낙천적인 인생관은 또 없지 싶어요.
하기야 살짝인 미소라도 툭하고 튀어나오지는 못하지요. 그 미소는 줏대에서 출발했을 겁니다. 수십 번의 크리스마를 거치면서 수백 번 만에 완성되었겠지요. 그러는 사이, 인간에 대한, 나에 대한 수없는 시행착오가 있었겠지요. 또 그러는 동안 수십, 수백 명이 나를 중심으로 한 팀이 되어 가능했을 겁니다.
어제. 하루 종일 집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집에 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고이 고이 감싸 창고에 넣었습니다. 그러면서 올해를 훅 날아, 분명히 다시 올 크리스마스에 얼른 다녀왔습니다. 그러면서 고단한 현실을 미소로 승화시키는 정신을 배워봅니다. 수없는 상처를 복원해 주는 미소를 약속해 봅니다.
그렇게 다시 만나요, 우리. 미소 잃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