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화요갑분]_(책상/테이블/식탁) 위에 있는 물건

by 정원에

창가 넘어 파란 하늘에서 짙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양이 빼꼼히 나를 들여다보며 말을 겁니다.

나의, 우리의 <수호자>입니다. 오랜만에 하늘만 한참 올려다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 시간이 그저 좋아 대답을 해 내느라 모닝커피가 식는 줄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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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자네는 진정한 용기가 무어라 생각하는가

무슨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까


수) 자네 안에 있는 모든 용기는 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해 말하는 겁니까


수) 만져지지 않지만, 더 잘 보이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네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수) 다행이군, 이제 그 편안해진 마음을 좀 들어 볼 수 있겠나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랑데에 샷추가, 따듯한 커피를 담아둘 수 있는 텀블러가 용기입니다.

바람 부는 공원에서 불고 있는 컵라면을 고이 간직해 주는 넓적한 종이가 용기입니다.

간장 조금, 두부 반모, 삶은 계란 한 개, 브라질 너츠를 담아내는 네모난 상자가 용기입니다.


간장을 담그는 일보다 내 삶에 대한 건전한 관점을 확보하는 게 더 쉬워 보인 것처럼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게 용기입니다.

리모컨이 사라지고, 길에 차가 넘쳐나 막히고, 예정했던 일들이 당연히 예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정도 조차도 나를 휘감아 도는 혈관들에 가득 찬 뜨거움이 사실은 유치하기 짝이없었던 분노였다고 인정하는 게 용기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이래야 한다, 부모는 이래야 한다, 아내는 이래야 한다, 자식은 이래야 한다, 나는 이래야 한다, 적어도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수십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나의 크고 작은 신념들이 당연히 틀릴 수 있다고 말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이는 게 용기입니다.



.........



수) 잘 들었네.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말한 용기들 중 어떤 것이 가장 시급한 용기인가

눈에 보이는, 만져지는 용기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끊임없이 버려지는데도 계속 생겨나 집 여기저기에 넘쳐납니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만져지지 않는 용기들은 일 년에 단 몇 번씩만이라도 잘 쓰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사람다워질 텐데, 정작 필요할 때는 꺼내 쓰는 게 쉽지 않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그 용기들만 쉽게 찾아 바로 쓸 수 있는 보관함이 필요합니다.



수) 이런, 아니, 이 사람아! 그 용기들만 모아둔 보관함이라면 이미 자네도 잘 간직하고 있지 않는가?

네? 어디에 말입니까? 네? 어디예요?? 저기, 수호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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