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은 { }할 기회입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요. 뻔한 이유로 행복하게] 03

by 정원에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바로 당신이고 나이다.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인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뻔한 이유로 뭉근한 행복을 바라는 당신의 가슴이 나의 등이고 나의 가슴이 당신이 등이 되어 주면서.]




우리 집에서 주말을 가장 애달프게 기다리는 건 나도 아내도 반려견도 아닌 스파티필룸이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발코니 창 가운데를 딱 차지한 지 십일년째다.


삼월부터 시월까지는 물을 준 뒤 딱 일주일이다. 하루라도 모른 척하면 금방 풀이 죽는다. 축 처져 보기가 안쓰러워 그냥 잠자리에 들거나 출근하기가 마음에 걸린다.


십 년 넘게 같이 살면서 어느 한해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다. 출근하기 전에라도 다시 흠뻑 물을 주면 퇴근하고는 온몸으로 고맙다고 외쳐준다. 가느다란 줄기에, 얇은 이파리에 그득하게 생기가 돌면서 삶의 환희에 어쩔 줄 몰라한다.


옆에 가만히 앉으면 생명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진다. 그런데 스파티필룸 이전에 나의 많은 반려 식물들은 죽었다. 아니 죽였다.


돌아보니 역동적이고 싱그러운 생과 사납고 건조해지는 사의 경계는 그렇게 어느 순간이더라.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리 물을 줘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뿌리까지 완전히 말라버린 거다.


우리의 감정도 그렇다. 서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촉촉하고 명랑한 관계를 유지하다 어느 순간, 경계를 넘어서면 메마른다. 위장에, 식도에, 머릿속에 얼음송곳이 들어찬 듯한 냉한 거북함이 가득해진다.


웬만해선 한번 마른 감정의 뿌리는 쉽게 살아나지 못한다.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유지하는 영혼을 가진게 인간이라지만 쉽지는 않다. 어떨때는 솔직하게 표현하는 스파티필룸이 나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일 년이라는 시간만 두고 보면 시월이 그 순간, 경계에 해당하지 싶다. 시월이 다 지나가면 온 세상은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마르다 얼고, 녹다 다시 얼다를 지루하게 반복되는 상황을 다들 얼른 벗어나고 싶어 한다.


시월은 아침, 저녁으로 큰 일교차 덕에 차가워 가라앉고 싶은 공기는 아래에서 덥혀져 뜨고 싶은 공기는 위에서 평화롭게 머무르는 상태가 반복된다. 흔히 말하는 '대기가 안정'한 상태다. 다른 계절에 비해 유난히 잦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이 높고, 뭉게구름이 풍성하고, 바람이 좋은 이유다.


시월의 대기처럼 안정된 마음은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평화롭고 바람없이 따듯한 상태. 이것은 자기 본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억지로 위아래로, 좌우로 뒤섞여야 하는 불편하고, 불만족스럽고, 불안한 상태가 방치되면 어렵다.


안정된 시월의 대자연은 가만히 지켜만 보기에도 좋다. 하지만 지켜보기만 하면 아까울 정도로 좋다. 신이 주신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하고, 경이롭고, 위대한 자연이 마냥 아까운 시월.


그래서 더욱 시월은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으로만 달려온 일 년이 다 가기 전에 꼭 숨 고르기를 해야만 한다. 얼어붙은 온 세상 속에서 내 감정의 뿌리도 얼어붙지 않기 위해서.


나가지 않고 걷지 않으면 햇살도 바람도 풀내음도 구름도 흙도 공기만 손해 보는 게 아니다. 내 오감을 살리고, 내 영혼의 창고에서 묵은 먼지를 털어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람처럼 휙 달아난다.


그전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어떤 걸 할 때 가장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을 칭찬하는지, 누구 덕에 그렇게 살고 있는지 나를 둘러싼 자연에 물어보자.


시월에는 그렇게 자연의 힘을 빌려서라도 언제나 감사하다 표현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는 용기를 내어보고, 사랑받기보다 먼저 주려 하고, 당연한 기쁨은 없다고 외쳐 기록해보고, 흠뻑 명랑해지는 충만함을 느껴보련다.


짐짓 여유를 부리느라 일부러 느리게 걸으면서 잔잔한 미소, 따듯한 시선, 배려깊은 목소리에 감정의 액세서리를 담아 내 영혼에 덕지덕지 붙이고 또 붙여 보련다. 내 영혼의 창고가 좀더 깊고 맑고 사시사철 따듯한 온천수로 흘러 넘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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