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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빽한 대숲에서의 마라톤을 멈추라

[ 금주의 영靈 단어 ] 01

by 정원에

열아홉 서른 한 명을 처음 만난 지 30분 만에 외쳤다.



'나를 쉽게 여겨라!'



이 선언은 치기 어린 쾌락의 표현이 아니다. 떠보는 기교도, 호언장담도 아니다. 진심 가득한 고백이다. 가르치는 이로 산 지 스무 해가 넘어선 이후 최근 몇 년간 (십 대들에게) 매년 하기 시작한 고백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진지함'



나는 이 가면뒤에 오랫동안 숨어 지냈다. 일머리가 좋고, 책임감이 강하고, 싱겁지 않은...이라는 주변의 평가를 칭찬으로만 해석하고, 그게 진짜 나이구나 하면서 살았다. 가지고 태어난 것(평소의 인상, 사태에 따른 표정과 눈빛, 평소의 말투, 신체적 언어)이 30에,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한 게 70 정도일 거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대부분의 열아홉 사이에서, 몇몇은 '풉'하고 울음에 가까운 조소를 터트릴 뻔하는 듯했다. 어쩌면 올해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낯섦 때문일 거다. 생김새도, 맛도 익숙한 '자장면'을 오늘부터 '짬뽕'이라고 불러라 처럼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관계에서 '쉽다'의 숨은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두려움(무서움, 불편함)에서는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배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가서지 않는다.

다가서지 않으면 관계의 유연성이 부족해진다.

유연성이 부족해 귀찮아진 관계에서는 자기 수용이 일어나지 못한다.

자기 수용이 일어나지 못하면 서로 긍정적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너와 나의 긍정적 변화를 위해 제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내가 지닌 원죄적 시그널(가지고 태어난 것)을 무시하라. 본성이 아니다. 알고 보면 쉽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 쉽게 말을 걸어라, 쉽게 질문하라, 도움 요청을 망설이지 말아라, 더 나아지겠다면 무엇이든 쉽게 제안하라"라고 당/부을 하는 것이다.



태양 아래 낮에 이렇게 시도하는 것은 나의 밤도, 새벽도 이렇게 지배당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 덕분에 지금은 조금 나아지고 있다.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빠져 지내지만은 않을 건가 보다. 글을 쓰는 고통이 즐거운 걸 보면. 이 당부를 매년 글로 나눠주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는 나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진지함'으로 도망쳐 살아온 나를. 게다가 '진지한 게 나쁜 건 아니니니까'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왜? '진지함 Seriousness' 자체가 지닌 고결함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머물러 있는 게 나쁘다. '걱정으로 뒤척이다 잠 못 이루고,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이럴까 저럴까 머뭇거리기 일쑤이고, 남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말을 못 하고, 이 눈치 저 눈치만 보며 결정을 못 내리고, 사소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진지함'이란 것이 마든이 지적한 것처럼 성급함보다 더 나쁜 것, 즉 우유부단함*에 애매한 미소를 입혀 (겉으로는) 좋은 사람으로 덧칠하면서 사는 원료이기 때문이다.

*오리슨 스웨트 마든, 강철의지, 2010, 오늘의 책, p.36



책임과 무책임 사이, 실존과 비실존 사이, 충만과 허무 사이, 고행과 쾌락 사이, 공감과 독단 사이, 도덕과 비도덕 사이, 이타와 이기 사이, 복종과 맹신 사이, 교양과 천박 사이, 진정성과 속물근성 사이.....



우유부단함은 이런 수많은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한다. 결국 매번 나의 이성은 '빽빽한 대숲에서 마라톤'을 시도하려 애쓴다. 신중하기만 할 뿐, 진중하지 못하다. 진중함 Composure으로 진화하지 못한다. 진지함은 진중함과 결이 다르다. 상황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하다. 문제 해결에 필요한 요소를 끌어다 구성하지 못하거나, 그러다 말아 버린다.



그렇게 진지함은 진중함에 비해


열정적이나 침착하지 못하고,

고요하나 허무로 흐르기 쉽고,

심각하지만 문제 해결에 서툴고,

신중하나 내면이 느긋하지 않고,

전문적이지만 업적에 치우치기 쉽고,

깊이 파고들지만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결의에 차 있으나 실천을 담보하지 못하고,

책임감을 가졌지만 신뢰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인에 대한 몰입감이 강해 사회적이지 못하고,


엄숙주의에 머물러 조바심을 숨기느라 전전긍긍한다.



어쩌면 장례식이 편하고, 종교의식이 편하고, 공식적인 행사나 회의가 편해지는 경향을 지향하는 걸까? 그 조차 철학적인 도덕적 기준을 내면에 갖추지 못한 상태의 껍데기로만 유지되는 건 아닌가? 이제라도 그 가면을 벗어야 한다. 스스로 벗겨내야 한다. 벗어나고 싶다.



분위기를 타고 (강제로) 웃기면, 아재 개그, 아빠 개그로 치부되고,

(애써서) 침묵하면 애매한 동조 아니면 급격한 반감으로 변질되고,

(신중한) 선택의 길이 잘못되었을까 밤을 새워 자책에 혈안이 되고,

밤낮없이 한 노력을 즐기지 못한 채 인정을 갈구하는 허탈감에 빠져드는



나의 내면은 대체되어야 한다. 느리지만 진하게!!



유머, 유쾌, 자유, 유희, 반항, 유람, 놀이, 영혼, 저항, 우주, 상대, 실존, 다원, 균형, 공존.....




그대 두려움에 감싸여 있는 영혼이여, 그대는 늘 이렇게 묻는다. 험난한 날을 그렇게 많이 보냈건만 평화와 휴식은 도대체 언제 오는가? 오 나는 안다. 편안한 날을 맞이하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랑스러운 나날을 고통으로 보낸다는 것을.


그대는 잠시 안식을 취할 뿐

다시 새로운 고통을 찾아 나간다.

성급하게 뜨는 샛별처럼

우주는 조바심에 가득 차 있다.

_헤르만 헤세, 삶을 견디는 기쁨, 2016, 문예춘추사



인류의 과제는 내 과제였다. 항상 진지함에 빠져 있으면 나만, 자주 손해였다. 대나무를 다 베어내든, 대숲에서 빠져 나오든!!





[지담_글 발행 예정 요일]

일 : 아빠의 유산

월 : 문장 유람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월요일 새벽에는 브런치 성장 일지 [브런치 덕분에]로 대체 발행합니다)

화 : 고3의 기술

수 : 문장 유람

목 : 모괜당(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금 : 문장 유람

토 : 금주의 영靈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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