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나모도, 가짜와 진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식 ] 04

by 정원에

어버이날이 내일이다. 그런데 몇 년 만에 그날 근무가 잡혔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엊그제 연휴 중간에 미리 찾아가 뵈었다. 늘 그렇게 하듯이 아내는 두 분을 모시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디 가서 어떤 것을 먹을지를 짰다. 나는 그저 아내의 기획(!)에 동의하고, 운전만 잘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날 하루는 나를 위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쨍한 햇살아래서 나는 내 에너지대로 사람이 모여든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플랜 b에 있었던 한식당. 마당 넓고 졸졸 흐르는 개천변에 자리한 하얀 집.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젊은 사장님과 동생(또는 아는 동생)이 운영하는 카페 형식의 밥집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지금껏 먹어 본 전골 중에서 가장 맛있는 육수,라고 육수의 장인에 가까운 엄마와 아내가 동시에 연신 엄지 척을 했다.


그 전골의 육수는 아주 심심했다.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데 자꾸 당기는 맛이었다. 각종 야채를 푹 우려낸 재료 본연의 맛. 우리 넷은 큼지막한 전골냄비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알뜰하게 국물을 먹고 또 먹었다. 그러면서 우리 식탁의 이야기는 '육수'가 주제가 되고 있었다.


엄마와 아내는 '육수'에 대한 서로의 비법에 대해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그러는데 옆에서 아버지가 그러셨다. '맞아. 그럼, 옛날에는 없어서 먹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또 '아지나모도'가 최고의 맛이었지.'


한국 전쟁 때 아이였던 두 분에게서 아내와 나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래. 그때는 육수를 다 아지나모도로 맛을 더했지. 미원말이야, 미원. 아지나모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미원이 된 거거든.'


아, 미원. 어릴 적 찬장 위에 있던 얇게 하얀 비닐봉지 안에 있던, 빨간 로고 안에 있던 선명했던 로고 '미원'. 찾아보니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의 입맛이 또 다른 형태로 강제 지배당한 사례 중 하나였다. 일본이 패망한 후 공장까지 한반도에서 철수했지만 그 맛을 잊지 못한 한국인들이 1956년부터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던, 글루탐산나트륨(MSG)계 조미료.


수족관에서 만난 우파루파

그런 후 역시 아내의 플랜대로 움직여 찾아 간 박물관. 낯선 어류, 더 낯선 광물, 아예 처음 보는 사막 선인장과 바다 산호. 무엇보다 거대한, 정말 거대한 나무 화석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넷이 구경했다.


우파루파와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한참을 미소 짓던 엄마, 아버지는 아지나모도를 맛있게 퍼먹던 그때의 표정으로 돌아간 듯했다.


햇살 아래서 연신 미소와 감탄을 동시에 뿜어 내시는 엄마,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자그마한 개인 박물관에서 1시간이 넘게 돌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주차장으로 향하려는데 미리 움직인 아내가 매표소 쪽에서 해맑게 웃으면서 우리한테 뛰어와 비밀을 알아낸 듯 이야기해 주었다.


1인당 1만 원 하는 관람료가 (절대) 아깝지 않을 거라고, 본인이 장담한다고 했던 매표소 직원이 뻥 뚫린 입구 쪽에서 여기저기로 흩어져 걸어 오르는 방문객 한 명 한 명에게 읍소하듯 전단지를 나눠주며 관람방식을 알려주려 애쓰고 있던 '저 꾀죄죄한 까만 옷'을 입고 있는 이가 사장님이라고 귀띔을 해줬단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 사연이 감탄스러워 사장님과 직접 사진도 찍었다. 인터넷에 마구마구 올려줘 홍보 좀 해달라시던 사장님은 30년 넘게 병원을 운영 중인 현직 치과의사였다. 그런데 개인적인 관심으로 다양하고 신기한 것들을 전 세계를 직접 돌아다니며 모아 그곳으로 하나 하나 옮겨왔단다.


신비로운 블랙 다이아몬드 가오리, 너무 귀엽게 생겨 한참 떠나지 못하고 대화를 나눈 우파루파, 둘레가 어른 서넛이 같이 손을 맞잡아도 안지 못할 거대 나무 화석들, 강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수많은 철제 조각상, 국내에서 가장 큰 철운석, 동물에서 직접 옮겨왔는데도 변색이 되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석회 동굴 종유석까지.


돌아오는 동안 꽉 막힌 반대쪽 차선 덕분에 더 뻥 뚫려 보이는 듯한 상대적인 만족감보다 정말 자신의 일생을 신나게 즐기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 더 좋았다. 제대로 된 자신만의 육수를 여전히 뽑아내고 있는 사람을.


요즘 들어 부쩍 솔직 담백하게, 심심하게 표현하시는 엄마, 아버지를 보면서, 박물관장인 치과의사를 보면서 오랜 시간을 '가짜 육수 맛' 같은 세상에 길들여져 지냈던 세월을 이겨낸 분들의 위대함을 느낀다. 그분들 덕에 우리가, 이제라도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 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게 사랑스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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