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온도

[ 잘 놀줄 아는 사람 ] 17

by 정원에

옆 단지에서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온 게 11년 전이다. 우리 앞집 주인들이 다섯 번이나 바뀐 시간이다. 옆 단지도, 지금도 아파트이다. 아파트라고 핑계를 대는 이유가 있다.

많은 이들이 공동주택에 거주하면서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 특별한 역할을 맡지 않는 이상 말이다. 얼굴은 익숙한데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전 단지에서는 그랬다. 큰 아이와 태권도장이 겹쳤던 ㅇ이네, 누수 때문에 잠깐 만났던 아랫집 정도.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면서 지내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사는 곳으로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만 나누어도 참 마음이 좋아지는 아저씨가 생겼다.


한겨울이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우유를 사러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와 보니 밤새 내린 눈이 쌓여 있었다. 몸은 쌀쌀했지만, 모든 게 포근하게 보이는 아침이었다.


그런데 옆라인 출입구 앞에서 나를 향해 두 분의 경비 아저씨께서 비질을 하고 올라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서 너 대의 승용차가 눈을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비어 있는 사이에 초록색 넉가래와 빗자루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넉가래 중 하나를 들고 우리 라인 앞 인도에 싸여 있는 눈을 주차장 쪽으로 밀어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 보니 두 분의 경비 아저씨와 가까워졌다.


그제야 송골송골 땀이 맺힌 두 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예, 예. 그거 나두세요, 저희가 치우겠습니다"


"아, 이거요. 아닙니다. 시간 괜찮습니다. 요 앞이라도 치워보겠습니다"


"어이구. 일요일에 쉬셔야 하는데...."


"일요일이어서 다행입니다. 이렇게 우리 집 앞 눈을 치워볼 수 있어서...."


"하하, 네. 고맙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를 지나쳐 반대편으로 멀어져 갔다. 그때 그분을 처음 만났다. 두 분 중 한 분은 그 사이 경비일을 그만두신 것 같은데, 다행히도 그분은 지금은 정문을 지키는 경비반장으로 승진하신 지 서너 해가 지났다.


경비반장이 되시기 전에는 우리 동 앞에서 거의 매일 비질을 하셨다. 근무가 있는 날은 그렇게 루틴을 만드신 것처럼. 평일에 퇴근을 하면서 무심코 지나쳤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서로 멈추고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우리는 먼저 보는 사람이 가까이 걸어와 인사를 건넨다. 비슷한 시간에 보이지 않으시면 궁금해질 정도이다. 왜 이럴까 가만히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그분은 6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얼굴은 짙은 갈색의 그을린 얼굴이다. 이마에는 서너 개의 주름이 잡혀 있을 뿐, 처지지 않았다. 얼굴은 언제나 방금 로션을 듬뿍 바른 듯 반짝인다.


항상 눈꼬리가 입꼬리보다 먼저 웃는다. 작은 키에 떡 벌어진 가슴에 유난히 눈길이 가서 꽂히게 걷는다. 가슴이 몸 전체를 끌고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모습에서 큰 힘이 느껴진다. 감정 이입인 걸 느끼면서도 그냥 기분 좋아진다.


그분이 요즘에는 나를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건네신다.


"어? 안녕하셔요. 어디 가셔?"


그분을 만날 때마다 그분이 먼저 '어디 가셔'한다. 그런데 이 말이 참 기분 좋게 들린다. 낮에 이리 꼬이고 저리 삐뚤어진 내 귀와 입이 행복해진다. 깍듯해서 어석거리는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투 속에서 친근하고 싶다는 느낌이 묻어나서 좋다. 나무 아래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긋한 가을향이 나는 것 같다. 그분한테 느낌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마음은 그렇다.


그분을 퇴근길에 만났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계단을 올라왔다. 몇 해 전 눈으로 덮여 있던 인도를 주욱 따라 걸었다. 반대쪽 인도 끝에서 우리 동 앞으로 툭 하고 나타나셨다.


떡 벌어진 가슴으로 저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멀리 떨어졌는데, 서로를 알아본 것 같다.


"어? 안녕하셔요. 어디 가셔?"


"아? 안녕하세요. 오늘 근무세요? 저요? 퇴근!"


하고 대답을 했다. 우리는 마무리할 겨를도 없이 서로 지나쳐갔다. 집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짧게, 반말을 해버렸다. 아차 싶었다. 그분과의 대화가 아니라, 나의 평소 모습이 걱정되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편하게 말을 하는 분들이 두서너 명이 떠오른다. 농담도 잘 받아주는 그런 사이다. 내가 경비반장님을 만났을 때 기분처럼 이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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