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때

[나무야 나무야] 06

by 정원에

봄 햇살 아래, 꽃비가 흩날릴 무렵이 되면, 아이들의 입가에선 어김없이 뾰로통한 질문이 튀어나오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 왜 하필 이렇게 놀기 좋은 때 시험을 봐야 하는 거예요?'. 야속한 세상에 '힘'을 좀 써달라는 소리다. 내게 그런 힘이 있을 리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다.


돌이켜 보면 나 어릴 적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꽃구경 간다, 소풍 간다, 여행 간다며 이리저리 꽃잎 위에 앉은 나비처럼 살랑거릴 때 다락방에서, 자취방에서, 하숙방에서 문제집을 펼쳐 들었어야 했다.


남들만큼 잘하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놓을 뱃심도 없었던 어정쩡한 학생이었으니 더했다. 무엇보다 그런 내게 '좋은 날'에 보는 시험이 늘 더 큰 숙제를 남기곤 했다. 끝나고 난 뒤, 무작정 달려드는 허탈감이 무력감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스스로 다독이며 다시 일어설 힘을 잃지 않아야만 했다.


'잘 노는 사람은 뭐든 다 잘'한다는 무언의 사회적 압력은, 성적뿐 아니라 성격까지 좋아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워주곤 했던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의심할 틈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을 다 잘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중압감을.


'놀기 좋은 때'라는 시기를, 꽃잎을 이내 떨구고 달고 단단한 열매를 맺기 위해 애쓰는 나무들의 시선으로 옮겨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어린 마음에 작은 위안을 얻곤 했다. 틈만 나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해송의 숲 속에 달려 가 앉았던 이유다.


사실, 우리가 '놀기 좋은 때'라고 부르는 때야 말로 나무는 가장 바쁘고, 많이 아프고, 안타까움이 반복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무는 사계절 내내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작디작은 꽃망울을 키워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러다 마침내, 사람들이 '놀기 좋은 때'라고 손꼽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 온몸으로 꽃을 밀어 올린다. 하나라도 더 많은 꽃을 피우기 위해 마지막 힘을 쏟아붓는 발화의 시기, 곧 절체절명의 발악인 시기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렇듯 나무에게도 녹록하지 않다. 매정하게 쏟아지는 봄비와 모진 바람에 연약한 꽃잎은 열매로 자랄 만큼 성장하지도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군다. 일 년을 꼬박 기다려 맞이한 찬란한 순간들이, 하루아침에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나무는 위대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다시 연둣빛 잎을 틔워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 다시 올 시간을 벌써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냥 피어나는 꽃도, 저절로 달리는 열매도 세상에는 없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시험'을 치른다. 과정을 통과한다. 다음 단계를 밟는다. 그러면서 비로소 자신의 꽃망울을 만들고, 스스로 발화할 능력을 키워 나간다.

문득 '언제쯤 이 모든 것이 끝날까'하는 질문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낙화한 지 오래된 나무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좋은 때'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꽃과 열매가 모두 다 떨어진 뒤의 오랜 시간, 텅 빈 듯이 느껴지는 그 시간이, 나무에게는 진정한 자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이라고 못난 선생을 찾아오는 아이들을 보면 그 시간들의 농밀한 차이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갓 졸업한 아이들은 아직은 자신들이 지금 꽃망울을 키우고 있는 '좋은 때'인지를 잘 모르면서 잘 크고 있고, 졸업한 지 오래된, 그때의 아이들은 제법 큰 나무가 되어 자기 숲을 지켜내면서 '좋은 때'를 보내고 있다.


매년 그렇게 아이들을 통해 깨닫는다. '좋은 때'는 내가 진정한 나무의 시간에 빠져 있을 때, 내 마음이 숲이 될 때라는 것을. 아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나무 사이를 거닐어 본다. 매년, 잊지 않고 찾아오겠다며 안아주고 간 아이들과 그 숲을 함께, 오래오래 거닐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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