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참 맛있다

[ 잘 놀줄 아는 사람 ] 18

by 정원에

며칠 전 봄비가 제법 소리나게 내리던 평일 오후 퇴근길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아내가 말했다.


'오늘 저녁, 부모님 모시고 축하 파티 어때?'


그렇게 우리 넷은 평일 퇴근길에 동네 전집에 모였다. 엄마는 원래 술을 전혀 못 하신다. 그런데 그날은 막걸리를 양은잔으로 반잔이나 드셨다.


그 덕에 살짝 볼터치를 한 새댁 같은 표정을 보며 엄마 신혼때 저런 표정이었을까 싶게 내내 웃으셨다.


다른 아파트 경비일을 보시는 아버지는 하루 건너 하루 출근하신다. 평소 과묵하면서도 표정이 없는 아버지는 퇴근 후 낮잠을 주무시다 나오셨는지, 얼굴에 잠이 좀 남아 있으셨다.


하지만 아내가 드린 두 잔을 연거푸 드신 뒤 발갛게 달아 오른 얼굴이 이내 맑게 깨어나고 계셨다. 그러는 동안 입꼬리는 쉴 새 없이 연신 올라가 있으셨다.


그런 모습을 보는 우리 둘도 마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한 달 동안, 두 분 만의 고생을 끝낸 날이기도 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 모습을 뵈니 몇 주 전 죄송한 마음이 다시금 송골송골 피어올랐다. 부모님은 우리 집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 공원을 지나 얕은 계단을 오르면 그 길 끝에 사신다. 몇 분 거리 안에.


동네 유명한 전집에서 뵙기 몇 주 전. 후텁했던 휴일 날 오후. 타닥이를 따라 산책을 하다 부모님 댁 아파트 주차장에 닿았다.


며칠 전 우리 집에 들르셨던 할머니, 할아버지기억하는지 그날따라 보행 신호바뀌자마자 원래 가던 길을 벗어나 횡단보도로 뛰어 들어가 냉큼 건넌, 타닥이 덕분이다.


그날, 부모님 댁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고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 동이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무려 한 달 동안. 얼마 전 그 이야기를 나눠놓고도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거다.


타닥이를 안고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면서 깨달았다. 두 분 다 좋지 않은 무릎으로 매일 이렇게 오르내리시고 계셨다는 것을.


차가운 알루미늄 회색이었던 1층 엘리베이터 문은 짙은 카키색 바탕에 황금색 줄이 역동적으로 그어진 채 비닐을 덮여 쓰고 있었다.


그 위에 <5월 16일 운행 예정>이라고 쓰인 안내문을 보면서 계단을 걸어 올랐다. 타닥이를 안고, 한참을 돌아 돌아 올랐다.


10층이 조금 넘어서면서 창가를 넘어 따라 올라온 봄 햇살이 이마에 땀을 맺히게 했다. 14층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두 분은 약간은 지친 얼굴이었지만 이내 너무 반가워하셨다.


며칠 전에 봤는데도, 아주 오랫동안 못 본 듯하시면서. 타닥이를 받아 안으시면서 더운데, 힘든데 걸어 올라왔냐며 나와 타닥이를 번갈아 쳐다보셨다.


당신들은 내내 그러고 사시면서, 마치 내가 백두산 천지를 올라온 듯 대하셨다. 나보다 내가 안고 온 타닥이는 마치 그 짧은 다리로 14층을 힘겹게 걸어 올라온 듯 쓰다듬고, 쓰다듬어 주셨었다.


한 달 내내 14층을 걸어 오르내리시던 어느 날. 아버지가 1층에서 무릎을 꿇다시피 하면서 분주하게 작업을 하던 젊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건네셨단다.


'안녕하세요. 어휴, 오늘도 수고 많으십니다. 고생하세요.'


그리고는 계단을 밟고 오르려는 데 눈과 미소로 아버지의 인사를 받은 그 기사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이랬단다.


'어르신, 어디까지 올라가세요?'


'저는 14층에 삽니다'


'아, 그럼. 잠깐만요. 이리 오세요, 어르신'


그렇게 그날 아버지는 아직 정식 개통을 하지 않은, 최신식(!) 엘리베이터를 혼자 시승하듯이 타고 단박에 14층을 오르셨단다.


막걸리를 두 잔 째 받아 마시다 말고 웃으면서 그러셨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거니까'


'그런데 바뀐 엘리베이터가 너무 좋아. 소리도 없이 빠르고. 젊은 사람들이 참 잘 만들었어. 내가 그걸 증명한다니까'


마치, 그 젊은 기사를 대변하듯 난생 처음으로 막걸리를 세잔이나 드신 아버지의 백일홍처럼 변한 얼굴에서는 눈도 입도 계속 웃고 계셨다.


굳이 걸어 올라가시겠다며 우산을 받쳐 들고 돌아서시다 아버지가 그러신다.


'어멈아, 오늘 너무 잘 먹었다. 좋았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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