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봄에서 가을을 기약하는 향기

[ 나무야 나무야 ] 10

by 정원에

어느새 낮이 길어졌다. 내일이면 벌써 하지.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동쪽 하늘엔 붉은 햇귀가 스며든다. 봄은 이렇게 여름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며 자연의 그라데이션을 완성하고 있다.


지난주 내내 후드득 떨어져 뒹굴던 버찌도 이제는 그 열정을 조금씩 마무리하는 듯, 떨어진 열매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버찌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이 새벽, 이미 장맛비를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장맛비를 타고 숲의 구석구석에 새 생명의 씨앗을 심고, 나누고, 간직할 거다. 이는 내년 봄은 틀림없이 다시 올 거라고 기약해 주는 자연의 고맙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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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끝봄의 길목에서, 이토록 감동적인 순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멋스러운 나무가 하나 더 있다. 초록이 짙어지다 못해 어둑해지는 산 여기저기에, 마치 바닐라색 브릿지를 넣어 꾸민 듯 환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무, 바로 밤나무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수백 년을 굳건히 살아내며, 매년 어김없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비록 그 풍성한 열매가 다른 생명체들에게 양식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씨앗을 통해 다시 새로운 나무를 끊임없이 싹 틔우고 자라게 한다.


그러면서 개별적인 존재는 소멸하더라도, 생명 자체는 유한하지 않으며 영원히 이어지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 속에 있음을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주렁주렁 매달린 풍성한 밤으로 넉넉히 증명할 거다.


밤나무는 사람에게도, 숲 속 생명들에게도 귀한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기 위해 뜨거운 여름을 유쾌하게 버텨내는 참 기특한 나무 중 하나다.


게다가 그 열매는 몇 알만 있어도 동물은 물론 사람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있다. 야생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야 하는 동물과는 달리, 따뜻한 보금자리 안에서 같이 또 따로 사는 듯한 우리마저 서로 둘러앉게 만든다.


도처에 이렇게 많이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끝봄의 상징은 단연 밤나무다. 밤나무는 한 나무에서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눈길을 끄는 축 늘어진 바닐라색 밤꽃은 바로 수꽃이다.


밤은 암꽃이 맺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씨방 안에 숨은 듯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다. 저 축 늘어진 수꽃들 사이에서 은밀히 제 역할을 다한 암꽃이 가을을 준비하고, 머잖아 탐스러운 밤을 매달아, 툭, 툭 떨어뜨릴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 군데군데에서 어질어질할 만큼 뿜어내는 밤꽃 향에 벌써 가을 향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신비로운 향기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미래의 약속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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