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구천 칠백 열 번째 저녁을 맞이하던 날. 8시가 다 되어갈 때 분리수거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는 하늘은 어둑했지만 여전히 파르스름했다.
자동으로 문이 열려 1층으로 나서는 순간, 달려와 몸 전체에 착 감기는 바람에 멈칫했다. 어쩌면 내 감각의 기억에는 없던, 처음 느끼는 바람 같았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보드라운 실크 천이 온몸을 덮는 듯 크리미 한 무언가를 천천히 입속에 머금었다가 조금씩 나눠 넘기는 듯 너무나 부드러웠다.
아니, 그 무언가를 온몸에 느릿하게 부어도 그런 느낌은 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양손에 분리수거 봉지를 든 채 계단을 내려서지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순간, 바람은 사진으로 찍어 남길 수 없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수거용 봉지를 비우고 그 안에 그 바람을 가득 담아 보관해 두고 싶을 정도였다.
뜨겁거나 차갑지도 않았다.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세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부유하는 어떤 이물질도 묻지 않은 듯한, 바람 그 자체였다.
그래서 얼른 분리수거를 끝내고 집에 올라가 다시 나올 채비를 했다. 연신 '아까워, 손해야'라는 내 말을 듣고 일찍 산책을 마치고 올라온 아내도 또, 따라나섰다.
그렇게 바람을 타고 우리 동을 몇 바퀴나 돌았다. 하루 종일 가둬진 타닥이도 하루 두 번 산책을 한 흔하지 않은 날, 순수 바람은 그렇게 우리 셋을 데려 다녔다.
바람은 금방 지나간다. 사라진다. 내 감각으로 기억하지 못하면 영영 잊힌다. 아내와 다시 내려가기 참 잘했다며 서로에게 감사했다.
타닥이 마저 산책길에 처음으로 혀를 길게 늘어 뜨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열중하던 흙과 풀 냄새 대신 머리를 곧게 들고 바람을 한껏 빨아들이면서 걸었다.
다음날 새벽.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몇 분 일찍, 거뜬하게 눈이 떠졌다. 원래처럼 그대로 누운 채 기지개를 켜고, 공중 자전거를 탔다.
엎드려 상체만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둑한 방안인데 코 끝에서 어제의 바람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손목에 차고 있던 워치 화면이 번쩍였다.
'기분 좋은 꿀잠! 지난밤에 충분한 수면을 취했으니 오늘은 뭐든지 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오늘도 파이팅!'
터치를 해보니 수면 점수가 꽤나 높았다. 진짜 바람덕에 오랜만에 깊은 잠을 오래도록 잤다.
전날 밤 한없이 부드러웠던 바람은 도파민 바람이라 이름 붙여줘야 할 것 같았다. 아주 먼 훗날 분명히 그리워질 고마운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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