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깍, 인연이 켜지던 순간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 24

by 정원에

5층에 도착하면 보통 아침 7시가 조금 넘는다. 정해진 출근 시각보다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도착한다.


뒤쪽으로 돌아 서 있는 건물이라 보통 여름에도 계단은 밤새 묻은 어둠이 남아 있다. 2층부터 한 층 씩 올라가면서 불을 켜는데 이 기분이 꽤나 좋다. 밤새 웅크린 건물을 깨우는 듯한 느낌이 참 신선하다.


건물 전체의 하루가 '딸깍'하고 내 손에서 시작되는 듯 한 감격스러움은 매일 얻는 덤이다.


그 시각에 어둠 속에서 새어 나오던 자그마한 불빛이 딸깍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큰 불빛 안으로 얼른 파묻히는 것을 느낀다. 교실 안에 이미 등교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몇몇 있다. 3층, 5층에 한 명, 4층에 두 명.


수시 원서 마감날인 그날도 하루를 온전히 켜면서 출근을 했었다. 접수 기간이면서 동시에 특별 전형으로 접수한 아이들이 증빙 서류를 우편으로 발송해야 해 교무실 한 켠이 우편집중국처럼 되던 시기였다. 각반 담임 교사들은 낯설어 하는 자기 반 아이들을 어미새처럼 도와주고 있었다.


학급마다 휴일 전날 점심 무렵까지 정신없이 바빴다. 접수 마감날. 그렇게 우리 반 아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일과를 마무리할 때였다. 썰물처럼 휑하니 다들 빠져나가고 혼자 남겨진 뒤 작은 해방감에 급격하게 허기지고 피곤해졌다. 서랍을 열어보니 컵라면이 하나 보였다.


참 오랜만에 자그마한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오후 커피도 연하게 한 잔 내렸다. 라면이 익기다리는 동안 새벽에 읽다만 부분을 이어 읽으려 책을 꺼냈다. 그때의 느낌이 참 좋다. 무언가를 끝내 놓고 나에게만 집중하면서 토닥거리는 기분이. 30분 정도 더 읽다가 나가면 40분 정도 떨어져 근무 중인 아내 퇴근 시간을 여유 있게 맞출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문이 스르륵 열렸다. 작은 미닫이 문은 두 번에 나눠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열렸다. 그 사이로 얼굴 먼저 내민 아이는 푹 눌러쓴 모자와 작은 얼굴을 검은 마스크로 다 가려 가느다란 눈만 보였다. 그 눈도 완전히 다 감은 듯 가로로 두 개의 줄이 나란히 그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누구니?' 했더니 '원서 쓰려고요' 하면서 동문서답을 했다. '어? 시간이 다 끝나가는데' 했더니 '죄송합니다. 빨리 접수할게요.' 했다. '몇 반이니?' 물으니 몇 반이라고, '이름이 뭐니?' 하니 아무개라고 했다. 내 수업을 듣지 않는, 낯선 아이였다.


대부분 이렇다. 아이들은 자신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먼저 묻지도 묻지 않으면 대답도 잘 해 주지 않는다. 물론 물음에 단답이라도 대답을 해주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고마울 뿐이다. 내 자리 옆에 있는 학생 접수용 컴퓨터에 앉아 얼른 접수를 하라고 했다.


그동안 모른 척 창가 쪽 자리에 서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잠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얼마뒤 다시 일어나 책을 읽었다. 허릿병 때문에 지금도 하루 6시간 정도는 서서 근무한다. 5층에 있는 아이들 대부분은 나를 '서 있는 선생님'으로 알고 있다. 몇몇은 자동으로 오르내리는 제 책상을 신기한 지 힐끔거리기도 한다.


잠시 뒤 그 학생이 흐느끼는 게 들렸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 같은데, 소곤거리는 그 사이사이에 한숨소리에 섞여 있었다. 묻고 싶었지만 통화 중이라 기다렸다. 하지만 이십여분이 넘게 통화가 이어져 '얘야? 접수 마감 시간이 끝나가는데?' 하고 일부러 말을 걸었다.


접수 마감이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었거다. 그제야 모니터 위로 초록색 코르덴 모자챙이 쑤욱 올라왔다. 그 사이로 두 개의 줄 같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나를 쳐다봤다. '어, 저 아이?'. 그랬다. 매일 아침 일찍 등교해서 작은 불빛 아래 웅크리고 있던 5층 여학생이었다. 아빠가 일찍 출근하면서 학교에 떨구고 간다고 표현했던 아이.


문제는 그 아이 역시 특별 전형 관련 서류를 증명받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좀 전에 막 접수를 한 두 개의 대학 모두가 그 전형이었다. 업무라는 게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할 때가 더 많다. 접수한 후 생성된 파일을 출력해서 '도장'을 받는 게 문제였다. 의미를 두지 않으면 아주 번거로운 절차이다.


00 이에게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해 보라고 했다. 아이가 상황 설명을 한 뒤 잠깐 바꿔 나와 다시 통화를 했다. 시간 내에 못 오신다는 담임과 통화를 끝내고 잠깐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그날만 그 아이의 담임교사가 되기로 했다.


특별 전형 증빙 서류에는 학교의 고유 일련번호가 해당 학생별로 부여되는데, 학교 직인과 담임 교사 확인 도장이 있어야 유효한 서류가 된다. 그런데 대학 입장에서 보면 확인 도장의 담임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처리해 본 게 처음이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정한 후 학교 직인 담당자가 있는 행정실에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그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붉어져 있었다. 숨소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나도 속으로는 급한데, 생전 처음인 아이는 오죽할까 싶었다.


'자, 여기에 이렇게 써. 초, 중 생기부 가지고 있지?, 주민등록 초본 가지고 있지?' 이렇게 두 마디를 물었는데 급기야 00 이의 볼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집에 있단다. 모든 서류가 다. 그때는 정말 '야? 뭐야?'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래 00야. 일단, 심호흡. 자, 해봐 후, 후. 됐어. 침착하자, 우리. 별일 없다, 없어. 다시 후, 후. 좋아. 이렇게 하자." 하면서 행정 처리 절차를 써주었다. 폰을 꺼내 찍으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00 이는 1층 행정실에 내려가 학교 직인만 먼저 받아 5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직인 위 확인 교사란에 내 도장을 천천히, 마음으로 눌러 찍어주었다. "00야, 내가 이제 너의 인생에 살짝 끼어들었는데, 어, 어떡할 거니? 그런데 정말 다행이다. 내가 늑장 부리면서 이렇게 남아있을 때 네가 와서 말이다. 아침에 일찍 학교에 온 덕에 이런 인연이 생긴 건지도 모르지. 앞으로 살면서 확률보다 인연을 믿어봐라. 그러면 되는 거다."


그제야 00 이는 검은 마스크 위로 붉어진 눈두덩이가 살짝 오므려졌다. 나도 같이 오므리면서 '살다 보면 의외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우연한 인연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하는 말은 내 안으로 삼켜 넣었다. '빨간 직인 위에 살짝 걸친 진한 (인). 그 뒤에 투명하게 '연'이라는 글씨가 혹시 보이지 않니?'하고 실없는 농담이 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면서 말이다.



"제가 인쇄를 하면서 배우는 게 있어요. 일이 쌓이는 만큼, 인연도 쌓인다는 것. 그래서 우리 집에는 영업사원이 없어요. 이렇게 손잡았던 친구들이 다른 곳에 나를 알아서 소개해 주거든. " _백창현 청산인쇄 대표, 2024, 롱블랙 인터뷰에서


일이 쌓이는 동안 인연도 그만큼 쌓이는지, 그렇지 못한 지는 스스로를 돌아보면 알 일인가 보다. 30년 넘게 한 가지 일만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하면 알게 되는 가 보다. 그제야 아이의 표정이 보였다. 여전히 마스크로 얼굴을 전부 다 가린 듯했지만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들어올 때 와는 달리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나가는 00 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앉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데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컵라면이 다시 한가득 부풀어 오른 게. 컵라면을 어쩌지 하고 손으로 들어 올리는 데 생각이 들었다.


"아!........ 어, 어, 아내 픽업?" 할 시간이.... 묵직한 컵라면을 손에 들고 얼른 교무실을 나섰다. 그러다 그 아이가 아침마다 불을 밝혔던 어둑한 교실 창을 잠깐 들여다봤다. 미소가 흘러나왔다.




[ 알림 ] _ 드디어!! 이번 주 토요일 8월 23일 [ 위대한 시간 2 ]

@일정 : 2025. 8. 23(토) 13:00-17:00 (1차 -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

2025. 8. 30(토) 17:00-19:00 (2차 - 온라인)

https://guhnyulwon.wixsite.com/my-site-2


@참여방법 : 참가비(1,2차 모두 합쳐 3만 원). 아래 신청링크 클릭

@신청링크 : https://forms.gle/3xgDsqr5VYCuQfpRA

https://blog.naver.com/ji_dam_

@브런치북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로 7월 28일부터 30일 연속 글쓰기 중입니다. 30일 뒤에 한 권의 초고를 완성하려는 도전입니다. 그러는 동안 기존 라이팅 레시피는 잠시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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