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空白
공백은 원래 있어야 할 것이 갑자기 사라진 부재(不在)와 상실의 ‘상황’이다. 어둠과 새벽을 등에 업은 가로등 아래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 같다. 날이 새기 전, 그림자를 무언가로 곧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레쥬메résumé위의 빈 한 줄처럼,
사랑이 떠난 뒤 혼자 남겨진 주말 오후처럼,
식탁에 마주 앉지 못하는 누군가의 빈자리처럼,
쓰지 못해 비워둘 수밖에 없는 답안지의 빈칸처럼,
공백은 채워야만 하는 불완전한 상황을 드러낸다.
여백餘白
여백은 그냥 있어도 별 다른 영향이 없는 성찰과 가능성의 ‘공간’이다. 환한 대낮, 구름과 구름 사이로 펼쳐진 텅 빈 하늘 같다. 그 비어 있음은 자체로 완전하며,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시 한 편에서 일부러 남겨둔 빈 행처럼,
대화 중 잠시 찾아오는 따듯한 침묵처럼,
눈물지으며 빠져 들었던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그림 속에서 색으로 채우지 않은 여운의 공간처럼,
여백은 비울수록 채워지는 완전한 공간을 창조한다.
이처럼,
공백은 비워진 자리지만,
여백은 비워둔 자리이다.
공백은 불안이 쌓이지만,
여백은 조화를 깃들인다.
공백은 채워야 할 과제지만,
여백은 누려야 할 자유이다.
그렇기에,
공백을 여백으로 기만하지 말아야 하고,
여백을 공백으로 폄하하지 말아야 하며,
여백을 여백으로 관조하는 사유를 즐겨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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