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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 오래된 것

[ 언어와 나의 세계 ] 62

by 정원에

시간이 흐르면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결과물이 남는다.

하나는 ‘낡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된 것’이다.


이 둘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낡음이 가치가 바랜 ‘소멸’의 얼룩이라면,

오래됨은 가치가 깊어진 ‘성숙’의 기록이다.

‘낡음’은 본래의 기능과 목적을 잃고, 쓸모를 다해 소모되어 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수없이 걸어 밑창이 닳다 못해 구멍이 나버린 신발을 내려다 보는 것과 같다.

그 신발은 더 이상 내 발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돌부리에 발을 다치게 하거나 걸음을 방해한다. 그저 많이도 ‘걸었다’라는 과거의 흔적만 남았을 뿐, ‘걷는다’라는 현재의 소중한 기능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유용했고 한때 나를 빛나게 했던 방식이나 습관이, 변화된 오늘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때, 그 순간부터 ‘낡아’가기 시작한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제의 방식만을 고집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것. 이는 결국 스스로를 현재의 삶에서 고립시키고 도태되게 만드는, 슬픈 ‘부적응’의 서사로 남는다.




반면 ‘오래됨’은 시간의 혹독한 시련과 마찰을 정면으로 통과해 내고, 그 본질과 가치가 더욱 깊어진 상태다.


오랜 세월 나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가구를 들여다보면서 느껴지는 마음이다. 칠은 벗겨졌을지 몰라도, 그 가구에는 나와 사랑하는 이들의 사계절이 담겨 있는, 세상에서 가장 드넓은 전시장과도 같다.


여기서도 삶의 모습이 보인다. 수많은 위기와 변화의 파도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하고 적응하며, 그 모든 경험을 자양분 삼아 쌓아 올린 조화의 탑처럼,

모든 상처와 시련을 극복하고 그것을 통해 더욱 단단해진 존재. 이것이 바로 '오래됨'이 들려주는 감동적인 ‘회복’의 서사다.


그렇다면 낡음과 오래됨 사이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내 삶과 내 몸에서 이 ‘낡음’과 ‘오래됨’을 명확히 구분해 내는 실천적인 능력이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며, 몸이 변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우리의 몸은 필연적으로 ‘오래되어’ 간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준엄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몸을 그저 ‘낡도록’ 방치하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존엄을 지켜낼 수 있도록 가꾸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관리하기를 포기한 몸은, 시간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낡아’ 버린다. 기능을 잃고, 고통을 호소하며, 결국 삶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된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방치’의 안타까운 결과일 뿐이다.


반면, 자기 몸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관리하며 돌보는 몸은, 시간과 함께 ‘오래된 것’이 된다. 세월의 흔적은 지혜가 되고, 경험은 노련함이 되며, 나이 듦은 그 자체로 깊은 아름다움과 존엄이 된다.


결국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질문을 던진다. 부적응의 서사를 쓸 것인가, 회복의 서사를 쓸 것인가. 낡아 스러질 것인가, 오래되어 빛날 것인가.

그 모든 답은, '오늘' 나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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