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 날숨

[ 언어와 나의 세계 ] 117

by 정원에

공기는 빈 곳으로 흐르고, 가득 차면 비워져야 한다. 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은 생(生)이 유지되는 유일한 방식이자, 삶을 대하는 태도의 가장 완벽한 은유다.

가만히 멈추어 호흡을 들여다 본다. 그러면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기를 갈망한다.


긴 여운을 남기는 말, 타인을 감동시키는 행동, 혹은 오래도록 기억될 성취를 바란다. 즉, 길고 깊은 '날숨'을 원한다.

하지만 들이마신 숨이 턱 밑에서 헐떡일 정도로 얕다면, 내뱉는 숨 또한 짧고 급박할 수밖에 없다. 폐부 깊숙이 닿지 못한 공기는 결코 긴 호흡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분노와 조급함이 깃든 순간을 떠올려보면, 숨은 언제나 얕고 거칠게 요동친다. 반면 깊은 이해와 평온, 진심 어린 위로가 머무는 순간에는 숨이 아랫배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천천히 올라온다.


들숨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깊이이고, 날숨은 세상에 전하는 표현의 길이다.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고 많이 내어줄 수는 없다. 들어온 만큼 나가고, 채워진 만큼 비워진다. 거스를 수 없는 순리다.


흔히 ‘숨이 차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그렇다. 왜 숨이 부족한데 ‘차다’고 표현할까? 그건 정작 필요한 것(산소)은 부족하고, 버려야 할 것(이산화탄소)은 몸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숨을 참아가며 길게 내뱉으려 애쓰는 것은 질식과 고통을 부를 뿐이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의 균형이 깨지면, 횡격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어깨 근육까지 총동원하며 강제로 흉곽(가슴 통)을 억지로 넓혀서라고 살고자 하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내게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자꾸, 자주 확인하고, 버리고, 다시 채우는 과정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숨쉬듯이 말이다.


깊이 사유하지 않고 깊은 통찰을 말할 수 없으며, 진심으로 감동하지 않고 타인은 고사하고 ‘나’스스로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질을 바꾸고 싶다면, 내뱉는 기교를 배우기보다 먼저 깊게 들이마시는 법을 익혀야 하는가 보다.


세상을, 타인을, 그리고 일상을 폐부 깊숙이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흉곽을 가질 때, 비로소 삶은 여유롭고 긴 궤적을 그리며 흘러나올 테니까.



식량은 창고에, 돈은 계좌에, 지식은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할 수 있지만, 숨은 결코 미리 저장할 수가 없다. 왜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는 자연의 강제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숨으로 오늘을 살 수 없고, 내일의 숨을 오늘 미리 당겨 쓸 수 없듯이, 오직 지금, 여기, 이 찰나에 들어오는 공기만으로 생을 유지하라는!


이 자연의 명령이 전하려는 진리는 분명하다. 생은 쟁여두는 ‘재고’가 아니라 흘러가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숨이 부족해지기 전에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



_내 마음의 한 문장

“삶의 깊이는 내뱉는 날숨의 기교가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들숨의 용량에 비례하며, 숨을 저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오직 ‘지금, 여기’만이 생이 연소되는 유일한 현장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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