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당; 무기

[ 내마음 사전 ] 128

by 정원에

싱싱한 바나나 한 꾸러미를 마트에서 식탁위로 옮겨다 놓는다.


잘 익혀야지 하다가 변색되고 물렁해지는 그 순간, 다시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 입 베어 물면, 물컹함속에 단맛이 진하게 퍼진다.


그렇게 과일이 가장 향기로운 순간은 싱싱할 때가 아니라, 썩기 직전 농익었을 때다.



삶도 마찬가지다. 데카당한 시기, 즉 상처받고 우울하며 한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하던 그 시간은 단순히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이 깊게 ‘발효’되는 과정이다. 상처가 곪아 터지는 고통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삶의 이면을 보게 된다.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감지하는 감각의 섬세함과 예민함은 상처가 썩어 문드러진 것이 아니라, 데카당의 선물인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쇠락의 시간을 견뎌낸 뒤 우리 손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흉터라는 이름의, 서사라는 ‘무기’다. 세상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서사.

대장간의 쇠는 뜨거운 불에 달궈지고 망치에 수없이 얻어맞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강철이 된다. 매끈하고 상처 없는 쇠는 결코 명검이 될 수 없다.

우리말의 ‘벼르다’는 원래 무딘 연장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곧 깍여 나가는 아픔을 견딘다는 뜻이다. 그 아픔을 견디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게 바로 데카당의 준 선물이다.


결국 데카당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은 안다. 가장 깊은 어둠을 통과한 눈동자가 가장 깊은 빛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약점이라 여겼던 예민함은 통찰력이 되고,

늘 괴로웠던 열등감은 성취의 동력이 되며,

흔한 눈물의 핑계가 되었던 상처는 타인을 위로하는 치유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이별, 실패, 모멸감, 그 모든 상처는 영혼에 독특한 무늬를 새기기 마련이다. 그러니 삶에서 핵심은 그 무늬에 대한 각자의 해석 태도일 뿐이다.

그 상처들이 어떤 시련에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는 증거이자, 삶을 지탱하는 '나'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될지, 스스로가 먼저 자신의 도피 수단으로 삼는 알리바이로만 이용당하고 말지!


그 해답은 ‘나’에게 있다.

‘오늘’에 존재한다.


데카당이 녹아 든 주물을 벼르고 별러 만드는 다마스쿠스Damascus 위에 ‘나’만의 삶의 무늬를 새기고 또 새길 뿐이다. ❤️


_내 마음의 한 문장

“가장 깊이 썩어 문드러진 계절이, 비로소 나를 베이지 않는 단단한 영혼으로 벼려낸 시간이다.”


라이팅 레시피3.jpg


작가의 이전글성냥; 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