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션, 이야기속으로 ] 11
도로 위는 거대한 철제 생물들의 정체된 호흡으로 가득했다. 연수는 그 행렬의 꼬리에 몸을 실은 채 창밖을 보았다. 엔진의 미세한 진동이 시트 너머로 전해질 때마다, 내 안의 조급함도 함께 파르르 떨렸다. 이란에서 터진 포성은 바다를 건너 이곳, 집 앞 낡은 주유소의 가격표를 기어코 뒤흔들어 놓았다. 경유가 휘발유의 어깨를 훌쩍 넘어버린 기이한 시절. 리터당 2,000원에 단 1원만을 남겨둔 숫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이 주유소의 전광판만은 홀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다.
1,737원
그 숫자는 화려한 네온사인 사이에서 수줍게 핀 들꽃 같았다. 160원, 혹은 280원. 그 사소해 보이는 간극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았다. 도로까지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은 마치 거대한 정맥 같았고, 주유소는 그 마른 혈관에 온기를 불어넣는 심장이었다. 연수가 기억하는 이 자리는 오랫동안 붉은색 SK에너지의 영토였다. 하지만 어느새 푸른색 현대오일뱅크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낡은 주유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빗물 자국처럼 남았지만, 그 위로 덧칠해진 새 브랜드의 로고는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로웠다.
주유소 사장은 누구일까. 연수는 10분 넘게 앞차의 뒷모습과 주유소를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차 안에서 연신 시계를 보거나 휴대폰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주유총을 든 직원의 손길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기름을 채우는 행위라기보다, 상처 난 피부에 연고를 바르는 손길에 가까웠다. 마사장은 아마도 ‘수지타산’이라는 단어보다 ‘보폭’이라는 단어 더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구름 위로 치솟는 유가에 발맞춰 뛰어갈 때, 누군가는 뒤처진 이들의 걸음걸이를 가만히 지켜보며 자신의 마진을 깎아 내어 그들의 보폭을 맞춰주고 있는 것이다. 1,737원이라는 가격은 이윤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웃과 맺은 소리 없는 약속처럼 보였다.
주유소 한편에 쌓인 빈 드럼통들이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 차가운 금속성 광채는 전쟁의 포화를 연상시키며 불안을 부추겼지만, 주유구로 흘러 들어가는 기름의 꿀렁거리는 소리는 다시금 일상의 평온을 되찾아 주었다. 연수 차례가 다가왔다. 차창을 내리자 기름 냄새 섞인 매캐한 공기가 훅 끼쳐 왔지만, 그 속에는 사람의 땀 냄새도 섞여 있었다. 낡은 사무실 안쪽, 돋보기를 쓰고 장부를 살피는 한 노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가 이 주유소의 주인일까. 그는 왜 모두가 올릴 때 홀로 멈춰 서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름은 단지 기계를 돌리는 액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출근길을 지키고, 누군가의 배달 오토바이를 달리게 하며, 결국 누군가의 저녁 식탁을 풍성하게 만드는 ‘생존의 윤활유’라는 사실을. 대기업의 간판을 바꿔 달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골목을 지켜온 자신의 자부심이었으리라.
<가득 넣어드릴까요?>
직원의 물음에 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유기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그것은 단순히 돈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내일로 나아갈 에너지가 차오르는 소리였다. 기름을 가득 채우고 주유소를 빠져나오는 길, 백미러로 다시 그 전광판을 보았다. 뒤로 줄지어 선 차들은 여전히 길었지만, 그 기다림은 더 이상 지루한 정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고단함을 이해하는 이들이 공유하는 짧은 휴식처럼 보였다.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내일의 유가는 또 어떻게 요동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낡은 주유소의 푸른 간판 아래서 연수는 보았다. 거대한 세계의 파도 속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로 노를 저으며 타인의 항해를 돕는 이가 있다는 것을. 연수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탱크를 가득 채운 것은 기름만이 아니었다. 1,737원이라는 숫자가 연수에게 건넨, 보이지 않는 다정함이 연수의 운전대를 단단히 붙잡아 주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다음 주유까지 연수는 이 따뜻한 온기를 품고 어디든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