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마음 배달부
용산에 막국수를 먹는 저녁약속에 참여하기위해, 집에서 3시에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한참 걷기에 빠져 살던 때였다. 두발로 땅을 밀어내고, 온전히 나의 힘으로 움직이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하천을 둥둥 떠다니는 오리가족, 계란 프라이 모양의 꽃, 차갑게 나의 몸을 관통하는 바람,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 하루일과를 다 마치고 퇴근하는 저녁노을과 직장인들 모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갔다면 보지 못했을 그것들을 걸었기 때문에 봤고, 봤기 때문에 평범할 뻔한 하루가 반짝이는 경험을 했다.
처음으로 먼 길을 걷다 보면 기본적인 길 찾기조차, 스마트폰이 없으면 찾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가거나 몇번의 환승을 통해 목적지를 찾아 가지만, 온전히 걷기로 가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갈림길의 환승을 거쳐야하기에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이 필수요소다. 우리 모두는 단 하나의 갈림길에서도 “실패”를 맛보기 보다는 “정답”이라고 하는 정도(正道)를 걷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결국 전기를 통해 작동하는 전자제품이기 때문에 언젠가 그 힘을 다하고 만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 했던 스마트폰이 꺼지고 나면 수많은 사람들, 건물들 가운데 혼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어 화살표나 익숙한 구조물들을 찾게 된다. 인간에게는 GPS기능이 없기 때문에 절대적 위치 보다 상대적인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대게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오고, 서울을 가로지르는 청계천 줄기를 찾는 일도 길 찾기에 큰 도움이 된다.
외국에서만 느낄 수 있을 듯했던 낯설다는 감정을 서울 중심에서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걷다가 보면, 고고학자나 탐험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서울이 꽤나 보물같이 아름 답기 때문이다. 이순간 나는 서울의 도굴꾼이 된 것처럼 길을 찾으며 서울 도심의 유물들을 훔쳐본다. 밤 중 빛을 내는 네온 사인들,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작게 피어나는 웃음들이 그 속에서 내게 전해지는 모든 경험들이 도시 속에서 걷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퍽이나 황금처럼 빛난다. 이쯤 되면 ‘아, 아까 거기서 왼쪽으로 가야 했는데.’ 같은 마음은 진작에 사라진다. 어느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온전한 나의 선택이라, “실패”는 없기 때문이다.
보석들을 훔치기 시작하면 금방 주머니가 가득 차버리는데, 나는 하나도 놓치기 싫어서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고, 코로 크게 숨을 쉬면서 냄새까지 담는다. 귀로 들어오는 소리들에 집중한다. 버스 브레이크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고함으로 귀가 아플 때도 있지만 그것들을 담는다. 바람이 불면 고개를 들어 바람을 느낀다. 뜨거운 태양은 찝찝한 땀을 불러오지만 그후에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게 만들어 준다.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는 나의 온기를 앗아가지만, 비가 오는 날은 맨발로 걷기 좋은 날이다. 신발 마저도 벗어 버리고 맨발로 아스팔트 도로위를 걸으면, 생각보다 따뜻한 땅의 온기가 발바닥에 느껴지고 비 때문인지 마찰력이 약해져서 생각보다 발바닥이 아프지도 않다. 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까지 꺼버린다면 퍽 좋은 경험이다.
그런 경험들을 “나”안에 차곡 차곡 쌓아 둔다. 택배가 가득한 물류차량이나 인천항 부산항에 즐비한 선박들과 인천공항에 출국을 기다리는 비행기들,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나 지하철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게 마음이 내 안에 탄다. 나는 이 녀석들을 승차 거부할 수 없다. 아무리 나쁜 것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짜증이 나는 것들이라도, 나를 지나친 모든 마음들은 나에게 승차한다. 하물며 좋은 마음들은 말해 무엇 하랴, 진작에 탐승해서 나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다. 나는 이 녀석들을 만난 순간 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티켓 검사도 출입국 심사도 온도 체크도 어떤 비용도 필요 없다. 보는 순간, 듣는 순간, 느끼는 순간 탑승하는 “마음” 승객이다.
삶이란, 마음을 싣고 마음을 전하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탑승한 승객들은 서로 인사하고, 얘기하고, 교감하며 모습을 달리 하기도 하고, 데면데면한 승객은 구석 자리에 앉아 누군가 찾아오기 전에는 섣불리 먼저 모습을 들어 내지 않는다. 외향적인 승객이나 내향적인 승객이나 모든 승객은 언젠가 하차한다. 목적지에 잘 내리는 승객들도 있는가 하면, 내리면 안되는 곳에 내리거나, 내릴 곳을 지나쳐서 내리거나, 먼저 내리는 등 실수를 범할 때도 있다. 우리도 “아차!”하고 정류장을 지나치거나 일찍 내려 버리지 않는가? 따뜻한 언어로 신나는 노래로 빽빽한 글자들로 무수히 많은 방식들을 통해 하차한 나의 승객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탄다. 이것은 나의 마음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좋았거나 나빴거나 그들 또한 승차거부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싫어도 그들은 탈 테니까 타고야 말 테니까.
혈액이 혈관을 흐르는 일처럼 당연한 것일 테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지독한 전염병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전염되는 것 아닌가. 정부의 규제로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마스크를 끼고, 자가격리를 한다지만 우리는 서로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서로의 몸을 무겁게 차지하는 마음이라는 승객들을 서로 만나 내려 놓을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코로나로 인해 다음에 보자는 인사도 나중이면 밥 한번 먹자 하는 변명으로 들릴 날이 온다. 이미 왔다. 자의로 타의로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전염병보다 혼자 지내는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필자는 무작정 전염병시대에 서로 떨어져 있기보다 함께하자는 연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누군가를 만나는 모든 것을 단절하고 살아가는 것은 무인도에서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유람선을 기다리는 꼴 아닐까? 어쩌면 무인도에 정착해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드릴 필요도 있다. 혹은 유람선을 대신할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세상의 문제를 그저 흘러가는 대로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주도권을 살아가는 본인 쥐고 있어야 한다. 무인도의 주인은 유람선의 선장이 아니다.
모두들 무인도에 살기 시작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우리 각자의 무인도에서 발견한 작고 소중한 보물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분명 달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