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눈 치우러 나오지 않던 집
아침에 이모가 전화가 왔습니다. 날씨가 매우 추우니 외출을 자제하랍니다. 그러면서 필요한 건 없는지 챙겨주십니다. 필요한 건 없지만, 보내주는 건 다 먹어치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모가 장바구니에 담아서 롯데마트에서 배달시켜 주신답니다. 가끔 이렇게 식재료를 챙겨주시는데 자취하는 입장에서 매번 감사합니다. 제가 언제 돈 주고 봄동이나 브로콜리를 사보겠습니까? 자취를 하고는 그 흔한 캔참치나 스팸도 안 사 먹습니다. 집에서는 그냥 쌓여있는 기본 템인 줄 알았는데, 자취하고 장을 보면 그것들이 꽤나 가격이 있습니다.
저녁이 돼서야 쓰레기를 버리러 집 밖에 나왔습니다.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립니다. 집 앞에 작은 마당에도 눈이 쌓이고 계단에도 눈이 쌓일 만큼 내리는 것은 올겨울 처음입니다. 오늘은 SNS에 온통 눈사람과 눈 사진이 가득하겠구나 생각합니다. 책상에 앉아 한국사 책을 펼치고 오늘 할당량을 채웁니다. 이후에는 온라인 대만 선교 팀장 모임을 준비합니다. 줌으로 진행하는 게 아쉽지만 화면을 끄고서 놓쳐버린 끼니를 때울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회의가 끝나고 동네 교회누나의 메시지를 확인합니다. 내린 눈이 얼어버리기 전에 눈을 치우랍니다. 중학교 때는 대구에 있어서 눈이 보물 같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인천에 있었지만, 기숙사 학교라서 학생들이 따로 눈을 치우지 않고 다른 분들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자취를 시작하고도 원룸 관리 인분이 눈을 치워주셔서 내손으로 눈을 치우는 경험은 군대가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딱 두 번입니다. 훈련소 때 논산에서 한번, 자대 배치받고 함안에서 한번. 함안은 경남에 위치했습니다. 특산물은 수박입니다. 무지하게 더운 동네라는 것입니다. 그날 눈이 내린 것도 십수 년 만에 내린 눈이라 이후에 전역할 때까지 눈을 치워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 눈을 치울 때까지만 해도 낭만을 찾았습니다. 눈을 모두 한 곳에 모아서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어야겠다. 시작하고 5분도 채 안 돼서 눈사람 계획은 포기했습니다. 손이 너무 시렸습니다. 빗자루 하나 찾아 집어 들고서 집 앞마당에 눈을 다 문밖으로 빼내고 계단의 눈을 쓸었습니다. 처음에는 위에서 아래로 몽땅 쓸어내리려고 했는데 비효율적인 것 같아 눈을 좌우로 치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계단에 마지막 칸까지 눈을 쓸어 치웠는데 옆을 보니 한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어디에 사는 총각이야?"
"저는 저기 위에 집에 살아요"
"내가 여기 20년 살았는데 저 집에서 나와서 눈 치우는 건 처음 보네, 내가 올해 70이 넘었는데 매번 나 혼자 저위에서 아래까지 치우느라 힘들었어 정말!"
"이제는 제가 치우겠습니다! 저는 26살입니다! 군대도 갔다 왔습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할머님의 말씀에 과장된 말투와 몸짓으로 대답하고는 마저 눈을 쓸었습니다. 지금 사는 집은 이전에는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됐습니다. 에어비엔비에서 슈퍼 호스트로 지정되기까지 하며 장사가 잘됐었는데, 코로나로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저렴한 가격에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 숙박하는 사람들이 눈이 온다고 집 앞에 눈을 정리하지는 않겠지 생각했습니다. 와중에 아까 들어가신 할머님도 빗자루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노랑 패딩의 다른 집 어머님도 빗자루를 들고서 나왔습니다. 두 분은 눈이 올 때면 함께 집 앞에 눈을 모두 치우셨다는데, 웬 젊은 총각이 있으니 어지간히 놀라신 듯합니다.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니 허리 아픈 것도 모두 잊었습니다.
"여기서 넘어지면 큰일 나, 여기서 넘어지고 죽은 사람도 있어."
지난겨울에는 다른 집에 할머님이 여기서 넘어지고는 집에서 꼼짝 못 하고 누워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랑 패딩 어머님도 살려고 눈을 치운답니다. 그냥 바로 죽는 건 안 무서운데 누워있다가 죽으니까 그게 무슨 민폐냐면서 눈치 우는 거 도와줘서 고맙다고 또 말씀합니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씀합니다. 처음에 만났던 할머님은 들어가시고 뒤이어 나온 노랑 패딩 어머님과 눈을 치웁니다. 눈이 계속 내리니까 눈을 다 치우고도 돌아보면 다시 쌓여 있습니다. 눈발이 잔잔해질 때까지 한참을 어머님과 눈을 쓸었습니다.
"두 명이서 치운 것도 아니야, 사실 매번 눈 오면 나 혼자 다 치웠어 저 아줌마가 치운 거는 몇 번 없어"
웃음이 터졌습니다. 웃으며 몸이 고된걸 잠시 잊어 봅니다. 콧물이 주룩주룩 흐릅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눈이 무서운 적은 없었습니다. 20층에서 내려다보는 눈 내리는 풍경은 퍽 아름다웠습니다. 집을 나와서 지금 사는 동네에서는 눈이 무섭습니다. 어디에 사느냐에 하늘의 눈이 예쁜 눈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람 목숨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오르막 내리막이 많고 어르신들도 많이 살고 계십니다. 눈을 다 치우고 집에 들어와서 SNS를 봅니다. 눈사람 사진,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 사진들이 보입니다. 그 뒤로 눈길에 미끄러진 자동차 사고 현장 사진도 보입니다. 나는 오늘 또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하나 가졌습니다. 앞으로 눈이 내리는 날이면 내 집 앞에 눈을 치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