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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든 Sep 03. 2021

오늘 날씨 너무 좋지 않아요?

날씨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오늘은 모처럼 쾌적한 날씨다. 계속 비가 내린 탓에 하늘은 잿빛을 유지했지만 오늘은 구름을 찾기가 힘들고 기어코 찾아낸 구름은 새하얀 뭉게구름이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한여름의 뜨거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을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마법 같은 날씨에 문득 대구의 어느 하루가 스쳐 지나갔다. 선명하게 모든 기억이 일렬로 줄지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땡땡이쳐버린 기억들이 나의 머릿속을 방문한 듯했다. 푸르른 이파리와 그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듬성듬성 생겨난 그림자와 막힘없이 내려온 반짝이는 빛무리가 한 몸처럼 바람에 춤을 추는 모습과 흡연구역을 모르는 사람처럼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시는 백발의 할아버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반바지에 나시를 입고 계신다. 꽃무늬 양산을 활짝 펼치고 주름진 얼굴과는 상반된 빳빳한 재킷을 걸치고 지나가는 할머니에게서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것도 이 세상의 클리셰다. 그런 요소들이 하나하나 모일 때 나는 대구의 어느 풍경을 기억한다. 나의 시선은 아파트와 주차장을 동시에 잡아내고는 주차장을 지나 아파트 정문으로 이동한다. 좁은 2차선 도로 양쪽으로 다니는 차는 그리 많지 않다. 아파트의 그림자로 어두운 부분이 있고 햇빛이 그대로 내리쬐는 부분도 있다. 밀짚모자에 하얀 난닝구를 입고 푸른색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잠자리채를 어깨에 지고 걸어가는 모습까지 있다면, "이건 너무 클리셰잖아?!"라고 말할 텐가? 그 소년의 피부는 물론 까무잡잡한 믹스커피색을 띠고 있다.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는 푸르스름한 멍이 든 것처럼 다른 색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 멍든 것은 아니다. 이 아이는 이번 여름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뛰노는 일에 열중했노라 이것을 증명하는 훈장과 같은 것이다. 


    어제저녁 유명 프로덕트 매니저의 강의를 줌(ZOOM)으로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타벅스에서 급하게 집으로 향했다. 너무 급하게 이동했던 탓일까? 카카오 뱅크 카드를 스타벅스에 두고 왔다. 스타벅스 직원이 훌륭하게 대처한 덕분에 카카오 뱅크에서 나에게 전화가 왔다. 나의 카드를 스타벅스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고객님이 찾아가 주시길 바란다고 알려주고 카드 분실신고를 하실 건지 물어왔다. 당장 내일 찾으러 가면 되기 때문에 나는 분실 신고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이 통화를 하기 전에 휴대폰에 찍혀있는 카카오 뱅크로부터 온 부재중 알람을 보고 나는 최근 업로드한 사람인, 잡코리아의 이력서를 보고 혹시 연락이 온 걸까? 상상했다. 당연히 가능성은 현저히 낮은 상황이지만, 누구나 상상은 제 마음 것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너무 비웃지는 마시길. 여하튼 그놈의 카카오 뱅크 카드를 찾으러 가는 것이 오늘 외출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컨디션도 멜랑콜리해서 카드만 찾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올 심산이었는데 이놈의 날씨가 퍽 좋아서 나는 지금 청계천에 한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사실 스타벅스에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누구는 알고 누구는 여전히 모르는 비밀이라, 그것은 바로 스타벅스에서 아무런 주문 없이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는 것은 합법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서에 아니 커피 한잔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왜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스타벅스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 민폐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스타벅스 정책에 허용되는 것이고 애매하게 먹고 싶은 게 없다거나 이미 하루에 허용된 카페인을 전부 섭취한 상황에서 추가적으로 커피를 먹고 싶지 않다거나, 스타벅스에 지나가는 길에 화장실이 너무 급했다. 등등 다양한 경우 모두 스타벅스를 그냥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이다. 카드를 되찾으러 스타벅스에 방문했다가 한자리 차지하고 필사를 했던 오늘의 나처럼 말이다. 요즘은 고린도전서라는 성경말씀을 필사하고 있다. 하루에 한 장씩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했으니 1주일에는 6장을 쓰고 있다. 고린도 전서는 바울이라는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썼던 편지인데 성경말씀 중에는 이 바울 선생이 여기저기 써 보낸 편지들이 많다. 필사 이후에는 큐티를 했는데 큐티는 Quiet Time(QT)이다. 스스로 기독교라고 말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세상 사람이랑 똑같이 말씀도 안 읽으니 "우리 큐티라는 이벤트를 매일 진행하자. 하나님과 독대하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자!" 라는 목표로 하루에 읽을만한 가벼운 양의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설을 담아 소책자로 만들어 큐티책이라 이름을 붙였다. 


    큐티까지 모두 진행했다면 다음은 분명 노트북을 꺼내어 들고 채용공고에 맞게 자소서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여 제출하고 면접 날짜가 잡힌 회사들의 서비스를 분석해서 면접 준비를 하는 것이 넥스트 스텝일 터인데, 도저히 이런 날씨에 카페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기에 "책을 사러 가자!"라는 명분으로 용산역 아이파크몰로 향했다. 린 분석, 린 고객 개발, 디커플링, 스프린트,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실리콘벨리의 팀장들... 등등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 골라 구매해서 읽을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사실 마음속에는 '샹치라는 마블 영화도 시간이 맞으면 볼까?'라는 생각도 있었다. 영풍문고에 도착해서 책을 둘러보는데 내가 1순위로 구매하고 싶었던 린 고객 개발, 린 분석, 도널드 노먼의 UX 디자인 특강... 이렇게 3개가 모두 재고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앞에서 언급했던 책들을 찾아 두고 당근 마켓이랑 예스 24를 검색해가며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저렴한지 머리를 굴렸더랬다. 당근 마켓에는 현재 모든 책들이 재고가 없었고 예스 24는 모든 책이 10% 할인이 되길래 '당장에 읽고 싶은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만 구매하고 다른 책은 온라인으로 구매하자' 라고 생각했다.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을 가방에 챙겨 넣고는 무인양품으로 향했다. 무인양품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브랜드는 아닌데, 지난번에 "지인들에게 검은색 펜 추천해주세요! 단, 제트스트림 제외!"라고 얘기했더니 무인양품 검은 펜을 추천하는 분들이 몇 분 계셔서 어떤가 한번 써보고 싶었다. 알파나 모닝글로리 같은 문구점에서는 무인양품 같은 브랜드 펜은 진열하지 않기 때문에 모처럼 외출한 날 사용해봐야 했다. 결과만 말하자면 별로! 왜냐하면 무인양품의 펜은 잉크펜이기 때문에 사용하고 1초 이내로 만지면 번져버린다. 잠깐만 지나면 전혀 번지지 않지만 나는 그런 펜이 싫다. 


    몹시 피곤하다. 집에 가야겠다. "아이파크몰"이라는 거대한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감당하기가 너무 버겁다. 가을이 오기 전에 옷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려고 했는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있는 나에게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당장에 집으로 돌아가자, 렌즈도 빼고 샤워를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서 자소서 포트폴리오 이력서 삼박자를 맞춰보자.' 용산과 서울역은 두정거장이라 순식간에 도착한다. 잠깐 앉아서 용산에서 서울역으로 이동하는 그 찰나에 나는 '나의 외로움과 허약해진 몸뚱이를 뜨끈한 음식으로 충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용산에서 남영역쯤 도착할 때 네이버 지도 어플을 켰다. 그 안에는 내가 지금까지 돌아다닌 음식점이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 우리 집 서울역 근처에는 나의 영혼을 채워줄 소울푸드가 없다. 바로 그다음 역 시청 주변을 살폈다. 서울역에서 문이 열렸다. '아 그냥 집에 가서 쉴까?' 서울역에서 열린 문을 보니 잠깐 그 마음도 들었지만, 나의 발을 움직이지 못한 것을 보면 그건 그다지 강력한 욕구가 아녔을 것이다. 닫혀버린 문을 뒤로하고 시청 주변에 있는 나의 소울푸드 북어국 집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양반은 왜 사이시옷 규정을 지키지 않는 거냐!" 뭐라 하지 말아 주시길 시청역 근처에 자리한 이 북엇국 집은 이름부터가 무교동 북어국이라 이렇게 써버린 것이다. 나도 북엇국이 맞는 표현인 것을 안다! 우리에게 구글은 가까이 있으니. 


    나는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면서 보이는 하늘과 그 주변 풍경을 좋아한다. 말마따나 "지하"라는 어둡고 답답한 공간에서 뻥뚤린 하늘과 햇빛을 마주하는 것은 내가 십수 년 복역한 교도소의 모범수가 아니더라도 흡사 출소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소울푸드라고는 하지만 북엇국 집에 가는 것은 이번이 2번째다. 첫 번째는 작년 여름 부터 한동안 만났던 연인과 함께였는데, 당연하게도 다시 방문하는 지금 그날의 기억이 조금은 떠올랐다. 어디쯤인지 확인하려 서로 통화했던 것, 내가 먼저 도착한 이후에 자동차 뒤에 숨어서 놀라게 했던 것. 그외에도 이것 저것, 하지만 깊은 그리움에 빠졌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그냥 생각이 난 것뿐이다. 두 명이서 들어갔던 가게에 혼자 들어갔다. 귀에 박혀있는 에어팟 프로를 제거하고 주문을 하려고 했는데, 여기는 어차피 메뉴가 하나라서 들어갈 때 몇 명인지만 물어보고는 후다닥 음식을 내주셨다. 아마 내가 귀에 콩나물을 끼우고 있어 하신 말씀을 잘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자리에 앉아 자세를 고치는 사이 공깃밥부터 메인 메뉴 북엇국까지 등장했다. 뽀얀 국물과 알맞게 풀어진 달걀, 일자로 잘려 줄지어 입수한 두부와 함께 푹고아진 북어들이 사이사이 빛을 내며 자리하고 있다. '아 북엇국은 변함이 없구먼.' 공깃밥 북엇국 그리고 나박김치까지 바닥이 보이게 입안으로 쓸어 담는다. 입속에서 잘게 잘게 찢기는 북엇살이 하나하나 느껴진다. 할머니 집이 생각난다.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북엇국,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던 그 어린날의 나의 입속에도 잘게 찢긴 북엇살들이 낭자했었지. 북엇살 하나하나에 작은 추억들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국물까지 모두 먹어 바닥을 드러낸 빈 그릇과 함께 처음보다 훨씬 좋아진 몸상태를 느끼며 '휴 다행이다 코로나는 아녔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자취생의 설움일까 제대로 챙겨 먹는다고 하지만 금방 식습관이 불규칙해지고 그러면 몸으로 바로 나타나는 것 같다. 9월이면 추석이 있으니 할머니 집에 가서 뜨끈한 음식들을 맘껏 먹고 돌아오리라.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청계천은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에 바로 뒤로 돌아!를 시전하고 청계천 쪽으로 걸어갔다. '아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노래가 절로 나온다. 아름다운 서울, 청계천이다. 연인들부터 노년의 친구들 어린아이와 어머니까지 거리를 가득 행복으로 채워준다. 모든 것을 새롭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어린아이는 어쩜 이렇게 이쁠까? 우리는 언제부터 저런 눈빛을 잃었나,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가진다면 늙어버렸다 할지라도 나는 어린아이처럼 아름답게 보일까? 반짝이는 물 위의 윤슬을 바라보며 걷는 어린아이가 바로 한 발짝 앞에 없어져 버리는 계단을 알지 못하고 발을 뻗는다. 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나는 아차 싶어 손을 뻗어 보지만, 아이는 살짝쿵 넘어진다. 크게 울어버릴 법도 한데,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뛰어가는 아이 그 뒤를 따르는 엄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아 청계천에 오길 잘했다. 북엇국을 먹길 잘했다. 용산에 가길 잘했다. 카드를 찾으러 가길 잘했다. 나 아주 잘했다. 


    안 되겠다. 오늘은 나에게 제대로 선물을 해야겠다. 청계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에 가야겠다. 아마추어들 작업실이라는 카페가 파고다 건물 뒤편에 자리해있다. 파고다는 누가 먹여 살렸을까? 학생들일까? 여기저기 토익부터 토플 오픽 등등 기준을 내던진 회사들일까?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아마추어 작업실로 들어갔다. 나는 언제나 얘기하지만 강남, 신사, 압구정, 잠실 이런 동네보다 종로, 을지로, 후암, 보문, 망원 이런 동네가 좋다. 가난한 것만이 예술적인 것이고 부유함에는 해결 못할 기름기가 끼어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동네가 그렇다. 그리고 언젠가 앞에 말한 동네들이 좋아지는 날이 올 것이다. '안 왔으면 좋겠다.' 오늘 내가 고른 원두는 Colombia La Morelia이다. 패션 프루츠, 멜론, 자몽 등의 Note를 가졌다고 한다. 커피 전문가는 아니지만 점점 더 디테일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는 나의 혓바닥이 비단 혓바닥의 문제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커피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조금 더 섬세한 액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참 좋다. 관계나 감정, 글쓰기와 서비스 기획 등등 여러 분야에서 커피에서 배운 섬세함이 조금씩 영향을 미친다. 주문을 마치곤 자리에 앉았는데. 한 스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갑자기 들어온 스님은 목탁을 울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렸다. 겉보기에는 당황하여 우물쭈물할 것 같았던 사장님이 당돌하게 "영업 중이니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스님은 열심히 치던 목탁질을 멈추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 '빠르게 다음 타깃을 물색하러 나간 것이라' 생각한다. '아 스님도 엄청 열심히 사시는 구나.' 불길한 기운이 가게를 점령했으니 해결하고 싶으면 돈을 내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 라고 말했으려나? 결국 스님의 영업 비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커피도 다 마셨고, 슬슬 손이 시려우니 이제 진짜 집에 가야겠다. 

이러곤 시원한 저녁 바람과 풍경에 이끌려 또 다른 곳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걷고 먹고 마시고 쓰고 읽으며 오늘도 나는 내가 퍽 괜찮은 사람이구나 생각한다. 

취업도 좋고 면접도 좋고 돈도 좋고 성공도 좋으나, 제발 오늘의 나를 잊지 말자, 세상 모두가 오늘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불현듯 찾아온 기분 좋은 날씨에 지난 과거를 돌아보고, 어린아이의 움직임부터 커다란 자연의 바람까지도 섬세하게 느끼며 하나하나 글로 써내려가기를 좋아하던 9월 2일의 김정원을 잊지 말자. 



오늘은 날씨가 퍽 좋았습니다. 구독자 분들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셨나요? 짧게라도 다이어리나 브런치에 기록해 보길 권합니다. 저도 하고 나니 훨씬 좋네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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