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가든 Jan 03. 2022

부끄러운 만큼

2022년 안녕

Last Carnival - Norihiro Tsuru 


"부끄럼", 21년을 마무리하는 나에게 홀연히 날아온 때 묻은 감정이다. 나에게 "부끄럼"은 비쩍 마른 백발의 노인 같다. 세상 가장 약한 모습으로 나에게 터벅터벅 걸어온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있다. 손과 얼굴은 쭈글거리는 주름으로 드러 차 있다. 쓰다만 휴지와 빛바랜 영수증이 재킷 주머니에 가득 차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짙은 고동색 바지와 낡은 회색 스웨터 은빛 돋보기를 끼고 있다. 그 노인을 나는 부끄럼이라 부른다. 노인의 모습이라고 누가 그를 얕잡아 보랴, 슬며시 다가와 내뱉은 작은 호흡에도 나는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 여리한 외관과 달리 속에는 단단한 무언가 가득 차 넘쳐흐르는 부끄럼을 나는 노인이라 부른다.


 부끄럽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냐만,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첫 문장이 사무치게 공감 가는 오늘이다. 지키지 못한 모든 것이 나에게는 부끄럼이 되었다. 세상과 언제든 타협하고 변모하려 하는 나의 소신과 가치관은 여전히 나의 편인가? 차가운 콧방울을 서로 비비며 서로의 귓속에 속삭이던 사랑의 맹세는 한 겨울의 잣나무 이파리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버리지 않았는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수많은 소망을 더하고 새로운 사랑에게 또 이별이란 나무의 묘목을 심는 행위는 퍽 잔인하지 않나?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끄럼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컴컴한 방 침대 위에서 나가지 않는 것이 모든 부끄럼을 반복하지 않는 해답입니까? 아니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파도 앞의 모래성을 나는 다시금 두 손으로 지어 올려야 합니까? 아니오. 어차피 물에 젖은 종이처럼 힘없는 나의 소신과 가치관은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두고 처음부터 바다였던 것처럼 그 위를 유영해야 합니까? 아니오.


 그럼에도 다시 고개를 들어야지, 육지로 걸어 나와야지. 세상에 나아가 수많은 사람을 마주하고 소리쳐야지. 나는 부끄럼이 많은 일생을 살았노라. 사랑하는 사람을 바보처럼 떠나보내고, 나를 사랑해준 그대를 아프게 했노라. 수많은 세상의 유혹과 속삭임에 타협했으며, 음란과 방탕의 쾌락에 빠져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 수많은 찰나의 연속을 보냈노라. 그러나 그 모든 부끄러움 속에서 나는 여기에 아직 살아 숨 쉬노라.


"젠장, 저 녀석은 부끄러움도 없나? 어찌, 입에 담기 어려운 일들을 세상에 자랑처럼 소리치는가?"


 그것은 바로 부끄럼이 결국 나를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백발의 노인이라 부른 부끄럼은 모든 젊음을 탕진하고 생명으로 늙음을 구매할 일 밖에 남지 않은 나의 모습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부끄럼에 절여져 버린 나의 모습은 이제는 젊은 날의 나에게도 찾아와 부끄럼을 알려주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어쩌면 나의 모든 생을 "참 부끄러운 인생이었다."라며 회고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나에게 찾아와 부끄럼을 알려준 백발의 노인을 다시금 바라보며 22년을 시작해봐야겠습니다. 22년에는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지난 사랑이 부끄러운 만큼. 나의 소신과 나의 가치관은 더욱 단단해져 갈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만큼 말입니다. 부끄러울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부끄러운 만큼 더 빛날 나의 22년을 기대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귀갓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