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다

시온의 궤도

by garim

여름의 마지막 밤을 고하듯, 매미의 짝을 부르는 울음이 더욱 절절히 울려 퍼지며 계절의 열기를 갈라놓는다. 한여름의 열기를 피해 도서관 안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서서히 누그러진 공기를 좇아 가을을 마중 나오듯 공원 곳곳에 흩어져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 고요한 풍경 한가운데, 서령이 있었고 시온도 함께 있었다.

서령과 시온은 오래전부터 함께 알아 왔던 사이인 듯 둘만이 이야기를 펼쳐냈다. 아팠던 서령의 얼굴에 오랜만에 활기가 도는 듯했다. 또한, 웃음기 없던 그의 얼굴이 서령과 마주하며 웃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하린은, 그들 사이에 얽힌 관계를 생각하며 마음이 사뭇 울렸다.

서령이 이석증으로 힘들어할 때, 하린은 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누고자 몇 번이고 이오를 들여다보았다.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일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타인의 고통을 처음 마주한 하린은 그저 제자리에 머물 수만은 없었다. 서령을 위해 영양제를 사 들고 찾아가고,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이기 위해 소소한 ‘영양 맛집’ 탐방을 함께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며 서령의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이오의 빛은 여전히 붉게 타올라 하린의 걱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아픔이 있다고 했지.”

서령이 무슨말을 꺼내려나 생각에 하린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저도 그렇고….”

서령이 결심한 듯 진지한 얼굴을 보이며 자신의 아픔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내가 가족 이야기를 그동안 하지 않았던 건 나에겐 가족이 없어서야.”

서령은 보육원에서의 어린 시절과 사회 속에서 홀로서기를 위해 견뎌야 했던 고통과 슬픔을 하린에게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던 하린은 이오 속 서령의 상처의 아픔이 떠올라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 눈물에는 서령의 아픔을 몰라주었던 미안함과 지금 서령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지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최근 꿈에서 얼굴 없는 엄마를 만난 서령은, 오래전 잊고 지냈던 상처와 마주했다.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그리움과 원망이 꿈속에서 흔들리며 그의 마음을 깨웠다. 마음의 병으로 가슴을 앓던 시간들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그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뿌리에서 돋아난 상처가 밤마다 잠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것이 서령의 이석증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었다.

서령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린은 조용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두 사람 사이에 말보다 더 깊은 이해가 흘렀다. 그제야 하린은 서령을 병원에서 만나기 전, 이오 속에서 본 서령의 궤도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들여다본 타인의 운명이 서령이었다는 사실과 바로 말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앞으로 서령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에 대한 부분도 모두 털어놓았다.
서령 역시 마음 깊숙이 감춰 두었던 비밀을 하린에게 고백하고 나자, 오랫동안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이 나이가 되도록 늘 혼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옆엔 하린이 있었네.”
서령이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자, 하린 역시 서령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되새겼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될 수밖에 없는 인연임을 확인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한층 더 깊어졌다.

하린은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려다, 지금은 그들 사이를 방해하는 것 같아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사이인지, 바라보기만 해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이어 준 끈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잠시 후, 서령과 시온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하린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리고 시온님.”

서령은 하린이 시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어?”

하린은 서령의 질문에 시온을 바라보다가 멋쩍은 웃음을 짧게 띄웠다.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었나요?”

그 사이 시온은 자리를 피하듯 열람실 안으로 들어갔고, 하린은 시온이 자리를 피하는 모습을 보며 서령의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시온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관계를 조심스레 열며 대화를 이어갔다.

“선배님이야 말로 시온님을 어떻게 알고 계신거예요.”

“내가 모르는 도서관 회원이 있던가?”

“그럼 지금 시온님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 계신거예요?”

“자기야 말로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하린은 서령이 병원에 있는 동안 시온을 알게 된 이야기와, 자신이 그동안 책을 건네며 알게 된 부분까지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서령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무언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시온이 누군가 건낸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았다더니 그게 바로 하린이었구나.”

서령은 아까 시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조심스레 하린에게 털어놓았다.
시온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꺼내 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하린이 건넨 책이 그의 마음에 작은 빛을 비춰 주었다.

처음에는 관심 없는 분야라 읽지 않으려 했지만, 책 위에 남겨진 하린의 메모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막상 책을 펼쳐 읽으면서, 그는 하린이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자신도 몰랐던 감정과 생각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시온에게는 책을 읽는 그 순간이, 자신의 마음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

서령의 이야기를 들은 하린은, 그때 자신이 건넸던 시온의 메모가 얼마나 진심을 담고 있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서령은 무언가 떠올린 듯, 다시 하린에게 말을 꺼냈다.

“하린, 시온은 이오로 볼 수 없는 거야?”

하린은, 그렇잖아도 시온의 궤도를 열어보려 했지만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듯 궤도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지금은 시온의 이오를 열어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서령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시온이 있는 곳으로 황급히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어 하린에게도 다가와, 한 손으로 하린의 손을 잡고 시온의 손과 맞닿게 했다. 손이 맞닿는 순간, 공기 속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서령은 두 사람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신중히 결정을 내린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린, 이제 이오를 꺼내봐. 나는 시온을 깊숙이 알고 있으니까… 혹시 모르잖아.”

하린은 서령의 진심 어린 눈빛과 시온의 약간 긴장한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이 떨렸다. 어이없다는 생각도 스쳤지만, 동시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조심스레 이오를 꺼내 들었다. 공기 속에 묘한 긴장과 설렘이 섞인 순간이었다.

잠시 후, 이오를 바라보던 하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린이 바라보는 이오의 빛 속에서 시온의 궤도가 열리기 시작했다. 궤도 속에서 시온의 운명이 드러나고, 금을 나타내는 한자와 함께 차갑게 빛나던 빛이 지금까지 시온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었다.

시온 역시 마음속 여린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빛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방어벽을 깨는 순간, 시온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온전히 활용하며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바르게 살아온 시온에게 지금의 상황은 스스로의 탓으로만 느껴졌고,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짐이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많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서령의 행동은 시온의 마음을 열기 위한 작은 계기가 되었다. 시온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멈춰 섰지만, 서령과 하린의 손이 맞닿는 순간 공기 중에 흐르는 미묘한 전류를 느꼈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이 닫혀 있던 벽이 살짝 흔들리며, 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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