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

시온의 마음 성숙

by garim

결혼 전, 아내와 가장 사랑이 깊어졌다고 생각한 시기에 아내는 갑작스럽게 시온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아내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동안 아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의 무너지는 모습을 모두 봐야 했던 시온의 어머니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다시 돌아온 아내를 믿을 수 없었고, 심지어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조차 의심할 만큼 마음을 닫아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시온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때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내를 외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뱃속의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그를 움직였다. 결국 그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서둘러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태어났던 그 순간, 시온은 말로는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는 벅찬 기쁨을 느꼈다. 아버지가 되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환희였고, 그 마음을 설명하려 해도 그저 ‘참을 수 없이 기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뜨거웠다. 하지만 그 기쁨은 아이의 혈액형을 확인하는 순간 산산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자신 사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었다. 시온은 처음엔 혹시 자신이 알고 있는 혈액형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아내 몰래 다시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변함없었다.

그날 이후 시온은 몇 날 며칠을 인터넷으로 뒤지며, 부모의 혈액형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 정말 존재하는지, 혹시 예외적인 경우가 있는지 수없이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그 반복은 사실상 믿고 싶은 마음과 믿을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조용히 버티려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의심이 마음의 틈을 파고든 순간부터, 시온은 아이를 바라보는 일이 가장 괴로웠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버거웠고, 아이의 작은 모습 하나하나가 죄책감과 혼란으로 뒤섞여 시온을 흔들었다.
그는 결국, 마음속에서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이 의심을 더는 숨겨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마음 한구석에서 ‘허락’하지 않는 감정이 계속 남아 상처가 될 바엔, 차라리 솔직하게 아내에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시온은 어느 날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아이의 혈액형을 물으며, 그동안 마음속에서 꺼내지 못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내 역시 아이의 혈액형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온이 그 사실을 알까 두려워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아내는 시온과 연애하던 시절, 잠시 마음이 흔들리던 때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 본의 아니게 감정이 기울어졌다고 했다. 시온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지면서 거리를 두려 했고,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이별을 선택해 그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멀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이의 친부에게 이를 전했지만 그는 책임을 두려워하며 연락을 끊어버렸다.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막막함에 무너졌던 아내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던 사람이 시온뿐이라는 생각에 결국 모든 사실을 숨긴 채 다시 시온에게 돌아왔다고 했다. 아이의 친부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은 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 아이가 태어나면 혈액형으로 모든 것이 드러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아내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내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언젠가는 말할 계획이었다고 했지만, 그 ‘언젠가’는 시온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인생에서 두 번째로 깊은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시온은 아내의 고백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돌아온 아내와 아이를 모른 척하고 떠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떠난 뒤 아내와 아이가 어떤 절망 속에 놓일지, 그 생각만으로도 그는 마음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덮고 아이를 ‘내 아이’라 생각하며 키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연달아 두 번이나 깊은 상처를 받은 마음은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려 해도 내면에서는 아픔이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보다, 결혼 전 아내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남편으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가 하루하루 더 버겁게 다가왔다.

그런 시온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 역시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시온이 무너져 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만 보는 것이 맞지 않다고 느꼈다. 결국 아내는 시온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를 놓아주는 것이 마지막 남은 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의 삶을 붙잡아두지 않기로,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이 서로를 위한 결정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시온은 거의 폐인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결국 휴직계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그는 누구와도 쉽게 마주하려 하지 않았고, 세상과의 연결고리 대신 책 속에 숨어 지내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렇게 조용히 도피하듯 찾은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다.

그곳에서 하린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지만, 시온에게는 삶을 전환시키는 작은 기적과도 같았다. 하린은 서두르지 않고 시온이 무너진 마음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도록 곁에서 조용히 도와주었다. 시온은 하린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품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린의 존재는 그의 마음 한켠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상처로 가득한 공간이었음에도, 하린의 따뜻한 마음은 그 빈자리를 부드럽게 채워주고 있었다.

시온은 복직 후에도 매일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다. 책은 여전히 그의 곁을 지키는 가장 든든한 동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속 깊은 상처를 온전히 덮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퇴근 후면 꾸준히 공원을 뛰기 시작했다. 뛰는 동안만큼은 머릿속을 짓누르는 기억과 감정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고, 다시는 아픈 마음이 자신을 삼키지 않기를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 속도를 올렸다. 땀이 흐를 때마다 마음속의 불안과 슬픔이 조금씩 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는 그 작은 변화에 기대어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준 것은, 주기적으로 보내오던 하린의 메시지였다.
그 짧은 안부 한 줄, 애쓰지 않은 따뜻한 말투 하나가 시온의 하루를 지탱해주는 온기가 되어 주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날들 속에서도, 하린의 말은 마치 조용하고 은은한 등불처럼 그의 마음 한쪽에서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시온은 생각했다. 언젠가 꼭 보여주고 싶다고. 자신이 이렇게 다시 일어섰다는 걸, 예전보다 성숙해진 모습으로.

하린에게 시온은, 이오를 통해 처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본 사람이었다. 그 특별한 순간을 알고 있었기에, 하린은 그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그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응원하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하린은 시온이 떠오를 때마다 짧은 안부 메시지를 남겼다. 그 작은 한 줄이 시온에게 온기가 되어 닿기를 바라며, 그의 하루가 조금이라도 덜 외롭고 덜 아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린이 쓰러지기 전까지, 그녀는 가끔 이오를 열어 시온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피곤 했다. 점점 따뜻해지는 이오의 빛을 볼 때마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온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다시 빛이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시온이 다시 나타났을 때, 하린은 예상보다 훨씬 더 달라진 그의 모습에 잠시 놀랐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불편함이 아니라,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두드리는 따뜻한 울림이었다.

시온이 조심스레 마음을 꺼내 보이는 순간, 하린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서령 역시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린은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을 조용히 흘려보냈다.

“고마워요… 시온님. 저도… 힘들었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린은 단지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타인의 아픔을 보면 본능처럼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사람이었다. 시온의 상처를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다시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이 분명했기에, 하린은 한 걸음 더 깊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혹여 자신의 진심이 부담되지는 않을까, 이미 아파 있는 마음을 다시 건드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하린의 걸음을 몇 번이고 망설이게 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남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동안 결국 자신도 자신의 아픔과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이 “당신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해준 순간, 하린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건넨 손길이 결코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음을. 타인의 마음속에서 흔들리는 빛을 보는 자신의 능력이 헛된 착각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어둠 속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었다는 것을. 그 사실은 하린에게 오래도록 남아 그녀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하린의 굳은 결심이 공간을 울리듯 전해지는 순간, 셋을 둘러싼 공기는 마치 보이지 않는 마음의 고리를 만들어 세 사람을 하나로 잇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얼음처럼 차갑던 시온의 마음은 어느새 따스한 온기로 채워져 있었고,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미소는 조심스러운 봄빛처럼 부드러웠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하린은 시온의 눈빛 속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깊이, 오래 잠들어 있던 마음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듯한 변화를 또렷이 읽어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령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눈빛을 읽어낸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잠깐만… 이 느낌은 뭘까? 시온 나이가… 지금 몇 살이더라?”

뜻밖의 질문에 시온은 눈을 깜빡이며 서령의 의도를 가늠하려 했다. 그러다 조금 머쓱한 듯 하지만 성실하게 대답했다.

“저… 어려 보인다는 말은 종종 듣는데요. 지금 서른여덟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입을 막았다.

“어머, 정말요? 전 저보다 훨씬 어린 줄 알고… 혹시 제가 말실수한 건 없을까요?”

순간, 하린의 당황한 표정과 말투에 시온과 서령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시온도 어색한 긴장이 풀린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린 씨도 굉장히 어려 보이시는데요. 설마… 저보다 위인가요?”

“아니요, 제가… 시온 님을 너무 어리게 봤나 봐요.”

하린이 붉어진 얼굴로 대답하자, 서령은 둘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온기가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보듯, 그녀의 눈매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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