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얼마나 다행인가

by 글 쓰는 사람

두 아이를 데리고 상담한 영어학원에 갔다. 긴장한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상가 건물 1층에 자리한 음식점들에 관심이 컸다. 둘째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길에 본 갈빗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면 안 되냐고, 천진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흐리며 엘리베이터 안에 두 아이를 태웠다.


학원은 오전 중에는 영어 유치원으로 운영되고 오후에는 초등학교 저학년들을 위해 수업을 하는 곳이었다. 영어 유치원을 졸업한 학생들이 계속 다니고 있는 듯했다. 긴장이 됐다. 두 아이가 해온 거라곤 영어학습지 윤선생뿐이었다. 두 아이가 혼자 힘으로 한글을 읽고 쓰는 게 가능해지면 영어 학습을 시작했다. 그게 학습지 윤선생이었다. 큰 아이는 7살 때 시작해서 5년 넘게 학습지 윤선생을 해서 읽고 쓰는 영어가 조금 가능한 상태였다. 둘째도 7살에 시작해, 윤선생을 시작한 지 1년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파닉스를 겨우 떼고 막 문장을 읽기 시작한 때였다. 학원 안에 들어서서 영어로 장난치며 노는 아이들을 보자, 그제야 둘째를 안 받아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꿈틀댔다.

두 아이 모두 각각 테스트를 받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둘째가 먼저 테스트를 마치고 나왔다. 둘째는 천진한 얼굴로 나와 로비에 있는 책을 꺼내 들었다. 아직 안 나온 큰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데 둘째가 제가 보던 영어 그림책을 내게 쑥 내밀었다. 읽어달라는 것. 긴장이 됐다. 침을 꼴깍 삼켰다. 학원 안에 있는 선생님들이 혹여 내 영어를 들으면 비웃지 않을까, 괜한 생각이 긴장을 열심히도 빚어댔다. 다 읽은 안도감에 책을 덮었는데 둘째는 또 다른 책을 들고 와 내 옆에 앉았다.


큰 아이는 한참만에 나왔다. 무언가 열심히 쏟아낸 얼굴이었다. 큰 아이는 둘째를 쓰윽 보더니 학원 책을 꺼내 읽어도 되냐고 물었다. 큰 애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데 따라 나온 학원 선생님이 마음껏 읽으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게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책 읽는 아이들 사이에 앉아 초초하게 시계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심장이 요동침과 동시에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담실로 들어갔다.


- 어머님, 이런 아이를 왜 여태 안 보내신 거예요?


선생님은 몹시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상담 선생님의 말뜻이 무엇일까, 고민했지만 도무지 짐작이 안 되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 너무 늦게 오셨어요, 이렇게 잘하는 애를. 이 아이는 더 빨리 왔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했을 거예요.


방송에서 보는 흔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말을 뻔하게 들었다. 큰 아이를 더 빨리 영어학원에 보내지 않은 나를 탓하려고 하는데 다행히 그다음 이어진 선생님의 말은 뻔한 말들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조언해 주셨고 학원이 도움이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과장 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두 아이의 상황도. 선생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큰 아이는 3학년 아이들이 있는 반으로, 둘째는 1학년 아이들이 있는 반으로 들어갈 거라고 했다. 10월 발령을 가정하면, 앞으로 7개월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다. 늦었다면 늦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생각에 지고 싶지 않았다.


학원에서 집까지 거리는 도보 20분 거리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천변을 따라 걸어가면 어떠냐고 물었다. 둘째는 갈빗집에는 안 가는 거냐며 슬퍼했다. 나는 다음에 사주마, 하고 아이들과 함께 천변을 걸었다. 하늘은 어둑어둑해지는데 걸음 속도와 함께 정신이 또렷해졌다. 나를 잃고 주변에 휩쓸렸던 사고가 내 곁으로 돌아왔다. 학원 선생님의 말이 현실적이어서 헷갈리긴 했지만 '너무 늦지는 않았다'라고 다시 한번, 조급해지려던 나를 달랬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안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것이니, 늦지 않았다.

방법을 찾았으니 늦지 않았다. 아니, 설혹 늦었다 할지라도 더 늦기 전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 보자.


천변 풀숲을 경쟁하듯 뛰어가는 두 아이를 쫓아가 얼른 손을 잡았다. 앞일은 하나도 모른 채 마냥 신 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덩달아 신 난 걸음으로 길을 걸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 우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보자.


큰 아이가 무얼 안다는 듯이 네,라고 대답하자 둘째가 맞잡은 내 손을 제 몸 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 그건 바로, 갈비 먹는 거.


어둑어둑한 천변 길에 멈춰 선 우리는 그날,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