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를 잊게 한 일본 커피

핸드드립 커피

by 글 쓰는 사람

커피를 좋아한다. 문장 안에 '정말'을 넣고 싶지만 꾹 참는다. 깔끔한 커피의 맛처럼 단정한 문장이라야 '커피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될 것만 같아서이다.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한창 일을 많이 할 때는 커피를 하루에 열 잔도 넘게 마셨다. 졸음을 떨치기 위한 목적만으로 커피를 마시진 않았다. (사실 난 커피를 마셔도 잘 졸고 잠도 잘 잔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면 콧속으로 훅- 들어오는 향긋한 커피 향이 좋았다. 좋은 커피 향을 맡으면 공간의 분위기가 마치 다른 공간인양 전환되는 듯했다. 마법 같은 그 짧은 순간을 맞닥뜨린 때면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커피를 많이 마신 날은 많은 기분 전환이 필요한, 힘든 날이었으리라. 커피를 위안제처럼 찾아 마셨다. 숱한 힘든 일들이 커피를 좋아하게 했다. 그러다 보니 맛있는 커피를 찾게 되었고 낯선 곳을 갈 때면 그 주변 커피집부터 검색했다. 근사한 커피집을 발견하면 약속 시간보다 서둘러 나가 검색한 커피집에 들렀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앉아 커피 향을 맡고 커피 맛을 즐겼다. 어쩌다 맛있는 커피집을 만나면 그렇게 좋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여름에는 라테 아이스를, 겨울에는 카푸치노를 즐겨 마셨다. 어찌 보면 멋 부린, 커피 맛을 좋아했던 것이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이 퍽퍽하고 힘들었을 때도 집 주변 커피집을 검색하는 일로 기분을 전환하곤 했다. 막 도착했을 때가 겨울이었으므로 검색한 커피집에 가면 카푸치노를 주문했는데 영 맛이 없었다. 일본 카페의 카푸치노는 우유거품은 부드러웠으나 커피가 너무 연해 밍밍한 맛이었다. 때로는 한국의 라테 같은 거피가 카푸치노처럼 나오는 커피집도 있었다. 커피의 맛을 섬세하게 따지며 먹는 경지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맛있는 커피와 맛없는 커피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일본의 카푸치노는 '맛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라테도 마찬가지.


라테와 카푸치노를 포기한 다음 선택지는 아메리카노였다. 하지만 아메리카노 역시 한국의 맛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일본의 아메리카노는 가루 커피를 탄 듯한 맛이 나거나, 산미가 강하거나, 이것이 사약 맛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쓰거나, 분명 색은 커피색인데 보리차 같이 밍밍하거나 아무런 맛이 안 났다. 아메리카노는 실패한 선택지가 되고 말았다.


- 핸드드립 커피를 마셔. 일본은 핸드드립 커피가 좋아.


어느 주말, 함께 새로운 커피집 찾기에 동참한 신랑의 말이었다. 그날 주문대에 선 우리는 핸드드립 커피를 골랐고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원두를 골랐다. 신랑은 산미가 있는 커피를, 나는 산미가 없는 커피를 골랐다.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 책도 사서 읽었건만, 나이 탓인지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매번 점원에게 묻는다. 바쁜 매장에서는 그럴 수 없지만 주문하는 손님이 우리만 있을 경우에는 신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점원에게 맛있는 원두를 묻는다. 작은 카페들은 대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대표 블렌드를 추천한다. 나는 점원이 자부심을 갖고 소개한 커피를 선택한다.


점원이 원두를 기계에 갈았다. 필터를 설치하고 갈린 원두를 부었다. 원두 위로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뜨거운 물이 원두를 적시면서 커피 향이 카페를 가득 채웠다. 으음, 나는 커피 향을 전부 먹어버릴 기세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커피 잔을 받은 것도 아닌데 기분이 들떠 의자 밑으로 조용히 발박수를 쳤다. 필터 밑으로 커피가 떨어지며 투명한 비커를 채웠다. 선명하면서 맑은 빛깔을 가진 커피가 비커 안에서 일렁였다. 신랑과 내 앞으로 각기 다른 커피 잔이 놓였고 다른 맛의 커피가 담겼다. 아, 맛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맛이었다. 기분까지 커피에 푹 절이는 깊은 향까지. 만족도가 높았다.

- 일본은 핸드드립이 가성비도 좋아.


500엔에서 700엔 사이의 핸드드립 커피라니. (물론 1000엔이 넘어가는 커피도 있지만 아직 도전해보진 않았다) 처음에는 커피 맛도 맛이지만, 가성비를 따지면서 기왕이면 핸드드립으로 마시지,라는 마음이 생겨났다. 핸드드립 카페가 주변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핸드드립 커피에 빠져드는데 한몫을 했다. 특히나 커피집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블렌딩 커피를 가지고 있어 그 카페의 맛을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 라테나 카푸치노를 먹고 나면 심해지는 입냄새도 없어서 좋다. 입안에 남는 커피 본연의 깔끔한 여운이 긴 것도.


커피집에서 먹은 커피가 맛있을 때면 계산대 주변을 어슬렁 거려본다. 이 커피집에서 파는 드립백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 커피집 이름을 내건 드립백부터 집어 들고 그다음은 산미가 없는 드립백을 추천받아 담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골라 잡는다. 드립백 한 개당 대게 200엔에서 300엔대다.


여행지에서도 커피집을 찾는 것은 중요한 임무다. 맛있는 커피집을 발견하는 것은 그 여행의 성패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간 커피집의 커피가 맛있으면 그 여행은 좋게 기억된다. 삿포로가 그랬다. 여행 마지막 아침, 맛있는 커피를 먹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젖어 있을 때였다. 신랑이 마지막으로 한 번 가보자면 호텔 근처 커피집으로 날 데려갔다. 가는 길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 선 커피집을 지나치기에 여기를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신랑을 따라갔다. 비즈니스 호텔 입구 옆으로 아주 작은 매장의 커피집이었다. 젊은 사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서로의 기호를 말하자, 우리에게 맞는 커피를 추천해 주었다. 여름이었기에 아이스로 주문을 했다. 핸드드립은 아이스는 안 된다고 하는 카페도 많고 혹 아이스가 가능하다고 해서 받아보면 보리차처럼 밍밍한 맛이 되어서 조심스러운 주문이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무더웠기 때문에 (삿포로인데도!) 아이스로 주문을 했다. 과연 어떤 맛일까 기대 반 걱정 반을 하며. 아이스로 받았는대도 불구하고 진하고 향기로웠다. 기대 이상의 맛에 웃음이 절로 났다. 너무 맛있다,를 남발하자 신랑이 보다 못해 한마디를 했다.


- 이 가격에 당연히 맛있어야지.


그렇다. 삿포로 커피집의 핸드드립은 900엔대였다. 여행지였기에 가능한 소비였다. 하하하. 아침 햇살을 피해 그늘 자리에 앉아 커피를 다 마신 후에는 선물 센트로 진열된 드립백 세트를 함께 계산했다. 젊은 사장에게 안 되는 일본어로 커피 맛을 극찬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삿포로의 무더웠던 여름 여행이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되었다. 좋지 않았던 기억까지 맛있는 커피 한 잔으로 역전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커피가 맛없을 때는 여행을 망친 기분이 든다.) 여행지 커피집은 재방문이 불투명하다는 이유 때문에 드립백을 살 때 인심이 좀 더 후해진다. 3개 살 걸 다섯 개 사게 하고 때로는 열 개 넘게 살 때도 있다.



집에서 커피를 내려 먹는 일은 대게 혼자 행하는 일이다. 오전에 텅 빈 집에서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물을 올린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끄고 오늘 마음에 드는 컵을 고른다. 대게 검은색 머그컵을 고르는 편이다. 머그컵에 끓인 물을 부어 잔을 데운다. 머그컵의 물을 주전자에 옮겨 담는다. 다시 가스 불을 켠다. 커피 드립백을 모아놓은 박스를 열고 커피를 고른다. 포장을 뜯는다. 순간 풍기는 원두 향을 깊이 들이마신다. 아, 좋다. 머그컵 위에 드립백을 올린다. 주전자를 천천히 돌려가며 드립백 위로 뜨거운 물을 붓는다. 조용한 집, 혼자 있는 주방에 커피 향이 하얀 김과 함께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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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안에서, 재방문까지 하며 사 모으는 커피 드립백은 야나카커피, 마메토라, 사와무라 커피다. 그리고 작년 첫 방문 이후로 좋아하게 된 이키 커피도, 시간이 된다면 꼭 다시 가서 사고 싶은 드립백 중에 하나다. 야나카커피는 원두를 전문점으로 취급하는 커피집이다. 커피를 팔고 있긴 하지만 테이크아웃으로 생각하는 게 편하다. 대게 매장이 좁고 테이블이 없는 곳도 있어서 매장 내에서 오랜 시간 편히 앉아 마시기 힘들다. (지유가오카에 있는 매장은 테이블을 갖춘 예쁜 카페다.) 원두를 사거나 드립백을 사러 가는 사람이 많은데, 드립백은 다섯 개를 세트로 사도 모두 후회가 없을 정도로 맛있다. 대체적으로 산미가 적고 부드러우며 진한 맛이다. 드립백을 뜯을 때마다 순간 터지는 커피 향이, 모든 시름을 잊게 할 정도로 너무 좋다. 마메토라는 도쿄 시내 곳곳에 매장이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원두 전문점답게 드립백 종류도 다양하다. 나라 이름을 딴 드립백이 일반적이지만 마메토라에는 빵과 어울리는 커피, 우유와 어울리는 커피 같은 흥미로운 드립백도 있다. 다양한 드립백만큼 맛도 다양한데 향과 맛 모두 우수하다. 다만 드립백의 모양이 보통의 드립백과 다른데 우리 집 머그컵에는 잘 안 맞아서 핸드드립을 할 때 조금 번거롭다. 사와무라 커피는 애정하는 가루이자와에서 시작된 베이커리 카페의 커피다. 베이커리도 지나치게 맛있고 레스토랑 메뉴 역시 그러한데, 커피까지 참 맛있다. 도쿄에도 매장이 있어 근처 지날 일이 있으면 드립백을 사 온다. 요 몇 년 사이 핫해진 이키 커피는 한 달 전 방문 때 드립백을 처음 보고 샀다. 그전부터 있었는데 내가 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분점을 낼 정도로 성장세를 타면서 새롭게 만든 거 아닐까 싶다. 이키 커피 역시 베이커리, 커피 모두 맛있는데 카페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 이키 커피는 직원들이 정말 친절하다. 무튼, 이키 드립백을 발견한 날 너무 반가워 집어 들었는데 함께 간 지인이 사주어서 선물로 받아왔다. 기대 이상으로 부드럽고 진한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