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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Feb 27. 2021

평온한 일상을 위하여

인도에 혼자 남아있던 남편이 드디어 귀국했다. 


6개월 전 아이들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휴직을 2년 하고 보니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고, 나를 잘 대우해주는 곳은 이전 직장뿐임을 알기에 복직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떠나올 때는 남편의 귀임이 한 1년 반쯤 남은 것으로 예상했지만, 회사에서는 생각보다 빨리 국내로 발령을 내줬다. 하지만, 인도에서의 귀국 절차는 늘 그렇듯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더디고 불확실했다.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느라 남편의 근황을 묻거나, 밤에 자다가 문득 잠이 깼을 때, 남편이 걱정되었다. 특별기 표를 끊어야 올 수 있는데, 여러 서류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톡데일 패러독스처럼, 기한을 정하고 그때까지는 00이 될 거야 라는 식으로 기대를 하고 희망을 가질라치면 여지없이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걱정은 하면 할수록 먹구름처럼 마음을 온통 뒤덮어버리곤 했다.


대신 나는 남편이 지금 우리가 사는 집에 예의 그 무심하고 어색한 듯 하지만 밝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상상했다. 밝은 빛이 남편의 얼굴을 비추는 환한 낮에 그는 들어와서 아~ 이렇게 꾸몄구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뿐이다. 그는 전세로 계약한 이 집에 밝은 얼굴로 걸어서 들어온다. 

즉, 2년 안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시기나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기대나 예상은 희망보다는 불안과 걱정 쪽을 향하게 마련이었고, 따라서 나에게는 문제의 해결보다는 속 쓰림과 신경증을 가져올 뿐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비판적이고, 원칙 따르기를 중시하며 특히 초중고 시절의 도덕이나 국민윤리에 나온 수준의 규칙과 에티켓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할까? 주로 남에 대한 판단과 평가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혹시 나 자신에 대한 것인가?라고 생각해보면, 답은 그렇다 였다. 


나는 나 자신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결론 내린다. 그로부터 어떤 행동지침을 정해서 그것을 따르려 노력하고,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반성하고 때로는 자책했다. 그것이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자 기전(mechanism)이라고 철저히 규정했다. 나의 일상은 삶으로 연결되고, 그 일상은 PDCA (plan - do - check - act)로 수레바퀴처럼 굴러가야만 했다. 


여기서 문제는 check 단계인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판단하려 할 때, 머리뿐만 아니라 나의 느낌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감정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도 있다. 그 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어땠는지, 어떤지를 느껴보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더 일을 잘 되게 한다는 느낌이 든다. 


타인과 상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때 그와 내가 다른 마음이라고 규정하고 시작하면 두려움이 생겨난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늠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두려움은 불안으로 연결되고 나는 상대를 방어적으로 대하게 된다. 나의 방어 스타일은 앞에서 말한 도덕과 국민윤리에 근거한 평가와 판단에 따른 것이므로 항상 타당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겉으로 볼 때 내가 냉정하고 원칙주의적이고 - 누군가는 대쪽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 때로는 믿을 만한 사람으로, 한편으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포장시켜준다. 


하지만, 타인과 내가 같은 마음이라고 여겨보면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논리는 이해 못할지언정, 심정은 공감해 줄 수가 있다. 연민이 생기고, 가끔은 애정이 생긴다. 미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에 집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내 마음의 평온함이다. 서로 갈등 없이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은 덤이다. 


같은 마음이라고 여기는 근거가 뭐냐고 따져볼 것인가?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믿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편이 내게 평온함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크기를 알 수 없는 만큼의 마음의 바다를 공유한다고 여기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호오포노포노'를 이용하기도 한다. 내 마음의 바다에 일어나는 파문을 정화하면 그 역시 도움이 된다. 


맥락도 없이 불안이나 걱정이 솟아날 때는 거울을 보며 그 감정을 느낀다. 책상에 커다란 이코르네스 거울을 세워두고 마음에서 뭔가 꿈틀거릴 때 가만히 거울 속을 바라본다. 눈에 힘을 빼고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일 때도 있고, 표정이 무섭게 변하거나,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마음에 생겨났던 감정들은 온몸을 전율하게 하기도 하고, 소름 끼치거나 굳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울을 보면서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의식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늘 이렇게 순간을 의식하면서 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은 의식하면서 평온함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에 무게를 두고 싶다. 내가 못하고, 부족한 것을 바라보면 그 반대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어차피 한쪽만 가지고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잘하고, 이미 많이 가진 것도 있는 법이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것이다. 나도 그렇고 타인도 그런 것이다. 


나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말랑해지는 느낌이 참 좋다. 뭔가 충만하고 평화로워지는 그런 느낌이다. 그 느낌을 갖기 위해 책을 읽고, 대화하고, 공부하고, 일기를 쓴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워진 것이었다. 나를 책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알아차리고, 수긍할 때 나에게 평온함이 깃드는 것이었다. 


아직은 자가격리 중인 남편에게 평온한 마음을 보낸다. 


#마음공부, #호오포노포노, #거울명상,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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