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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Dec 16. 2021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 J. 파머

처음으로 이 책을 접한 것은 예전에 했었던 공부모임의 필독서로서 였다. 그때는 밑줄도 그어가며 읽었는데, 무엇인가를 느낀다기보다는 공부로써 대한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도, 한 권 사서 책장에 꽂아둔 덕에 뭔가 마음이 심란해질 때, 이제는 삶이 내게 말을 좀 걸어보려 하나.. 해서 펼쳐보곤 했던 책이다.


한동안 카렌 암스트롱의 <마음이 진보>, 조셉 캠벨의 <블리스>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뭔가 내가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면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을 쓴 작가들은 인생이 더 깊은 곳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심리학 너머에 있어 보이는  다른 마음의 세계에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내가 밑줄 그어놓고 갈무리까지 해 둔 대목이다.


****

p. 121


나는 내가 기반이 없는 땅, 안전하지 않은 높은 곳에다 발을 딛고 살고 있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높은 고도에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문제는 간단하다. 미끄러지면 길고 긴 추락의 시간을 거쳐 바닥에 떨어지며 간혹은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것이다. 땅으로 내려서는 것이 축복인 것도 간단하다. 미끄러져 넘어져도 그것은 대개 치명적인 것이 아니며 곧 회복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높은 곳에서 살게 된 데에는 최소한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지성인으로서 생각하는 것 - 이것은 내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이다 - 뿐만 아니라 주로 신체 중 땅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 머릿속에서 살도록 훈련받아 왔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신을 체험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추상적 개념에 더 열중했다. 지금은 그것 때문에 좌절감을 느낀다. '말씀이 살이 된다'는 가르침을 핵심으로 하는 데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육체 없는 개념들에 매달려 왔단 말인가?


셋째는 높아진 나의 에고 때문이다. 우쭐해진 에고는 실제보다 나를 더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나의 왜곡된 도덕률이다. 그것이 진실하고 현실에서 가능하며 내게 참된 생명을 주는 나의 진짜 모습을 살펴보기보다는 내가 되어야 하는 사람, 내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의 이미지에 따라 살도록 이끌었다.


오랫동안 그런 '해야 하는 것들'이 내 인생의 추진력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에 나를 맞추지 못하자 나는 스스로를 나약하고 믿지 못할 사람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멈추어  "이러저러한 도덕적인 나의 이상들이 타고난 나의 본성에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들이 내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우울증은 나를 안전한 땅, 한계와 재능, 약점과 강점, 어둠과 빛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나의 진실, 나의 본성의 땅 위로 내려서게 하는 친구의 손이었다.


----(중략)--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부르던 친구의 모습이 바로 토마스 머튼이 얘기한 '참자아'이다. 이것은 우리를 우쭐거리게 부풀리고 싶어 하거나, 또 다른 형태인 자기 왜곡으로 우리를 위축시키고 싶어 하는 에고가 아니다.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허공을 떠돌고 싶어 하는 지성도 아니며, 추상적인 규범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 도덕적 자아도 아니다.


그것은 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 안에 심어 놓은 바로 그 자아이다. 그 자아는 우리에게 더도 덜도 원하는 것이 없다. 우리가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참자 아는 참된 친구이다. 그 우정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일 뿐이다.


****


현실의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파커가 말한 저 네 가지 이유와 거의 비슷한 이유로 높은 곳에 나를 위치시켜놓았고,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미끄러질라치면 갈팡질팡 하기 일쑤다.


그런데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나라는 존재가 또 내 안에 있다니... 어쩐지 그런 존재가 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내가 뭘 해도 다 인정하고 다독여주는 그런 존재.


카를 구스타프 융은 신을 믿지 않는다 했다. 다만 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나도 그 존재가 있음을 알고 싶다.


그래서 참자또는  또는 관찰자 등등의 여러 이름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존재를 알기 위한 여정에 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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