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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Aug 28. 2020

시간 쓰기의 재발견

두 번째 자가격리를 하면서...

어쩌다 보니 자가격리를 또 하고 있다. 


인도에서 입국하던 6월에 아이들과 친정집에서 부모님을 쫓아내고(?) 첫 격리를 했었고, 이번에는 회사의 기숙사에서 나 혼자 하는 중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복직한 지 이틀 만에 만난 부서 선후배들과 점심시간에 스치듯 만나 커피를 마신 것이 원인이긴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인도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마스크를 벗었던 것 같은데, 그때 그곳에 있던 한 명이 확진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밀접접촉자가 되어 그 아픈 코로나 검사를 또 받고, (감사하게도) 회사에서 제공해 준 숙소에서 머무르는 중이다.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는 현대적으로 보였던 기숙사였는데, 막상 입실을 해 보니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이미 나는 숙소라고 하면 호텔, 그것도 3성급 이상은 되는 그런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보다. 입소자가 각자 관리할 뿐 아무도 따로 청소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바닥에 까만 먼지, 곰팡이 핀 책상 의자, 군데군데 소독약인지 피 인지 모를 것들이 묻어있는 커튼과 매트리스.. 욕실도 으레 그렇듯 줄눈에 곰팡이 까지. 


급작스러운 업무 공백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부서를 생각하면 누구한테 불평은커녕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있어야 할 판이라서 같이 입소한 사람들끼리 각 방에서 오로지 카톡에 말하며 웃고 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머릿속과 손가락만 바쁠 뿐) 커피를 못 마셔서 그런지 머리는 무겁고, 바닥은 닦아도 계속 더럽고.. 허리가 아파서 평소에도 구부리는 청소는 하지 않던 터라 대충 닦아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찜찜하고 외로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첫날에는 톡방에 타바타, 스트레칭, 홈트 등이 줄줄이 올라왔지만, 하루가 지나자 이내 시들해졌다. 나도 딱히 서서한 운동 이외에는 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참에 읽으려고 가져온 바딤 젤란드의 <리얼리티 트랜서핑>이 세 권이나 책꽂이에 있고, 리디 셀렉트에서 다운로드해놓은 책이 서 너 권 있다. 그리고 Nicholas Saprks의 <DearJohn>을 필사하는 중이라 그 책과 노트도 있다. 그런데 왜 이것들에 즐거이 손이 가지 않는 것일까?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갑자기 필요하다고 느끼는 새 노트북을 찾아보거나, 잠이 안 오면 넷플릭스에서 도깨비를 보거나 하는 일들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찜찜함과 원하는 물건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압도당했는지도 모른다. 이것도 바딤 젤란드가 말하는 일종의 '펜듈럼'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부정적인 마음에 맡겨버린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오늘 아침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 방에는 지금 내 집에 없는 나의 전용 책상이 있고, 비록 곰팡이 때문에 비닐과 수건으로 덮어서 앉아야 하지만 책상용 의자도 있다. 아이들과 상관없이 나 혼자 잠들고 깰 수 있는 침대도 있고,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쾌적하게 지낼만한 공기도 있다. (물론 에어컨은 호텔식으로 내 맘대로 켜면 된다) 다행히도 나 혼자 쓰는 욕실도 있고, 빨래를 해서 말릴 수 있는 충분한 햇볕도 있다. 


아하, 항상 그렇게 원하던  '나만의 공간', 이렇게 가졌구나! 감사합니다.


인도에 처음 갔을 때는 그야말로 짜증과 불만이 부글부글 끓곤 했다. 없는 것, 못 먹는 것, 나와 다른 것에 온통 마음이 다 쏠려있었다. 한국 음식은 가끔 마트에 불시에 들어오는 '오뚜기 진라면, spicy' 이외에는 더 가끔 들어오는 '불닭볶음면' 정도. 쌀도 우리가 먹는 sticky rice는 대도시에서 택배로 사 먹어야 했고, 김치는 한국에 나갈 때 사 온 것을 아껴가며 먹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역시 한국에서 얼려온 것 아껴가며 먹었고, 김, 참치캔, 스팸도 모두 마찬가지이자 귀한 음식들이었다. 그런 현실에 불만스러워하며, 항상 더 풍족한 먹거리를 꿈꾸며 지냈다. 


하지만, 그것도 지내다 보니 그곳에서는 그냥 그런 것일 뿐이었다. 뭐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더 다양한 음식이 있다고 해서 잘 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맛있게 즐겁게 먹으면 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생각이 났다. 


이 방에서 또 한 가지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은 시간을 눌러 담듯 무엇인가를 하면서 꼭꼭 채워야 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크로노스적 시간인 24시간을 25시간이나 48시간으로 보내야 한다고 누가 나를 세뇌시켰단 말인가! (또 피해자 모드. 나 스스로 선택 아닌 선택을 했을 것인데..) 그 의무감으로 매 순간을 빈틈없이 살기 위해 time tracking app을 써가면서 매시간을 체크하고, 다이어리도 10분 단위로 나누어진 것을 쓰면서 형광펜으로 하루의 시간 사용 패턴을 표시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카이로스적으로 25시간이 되지 않았음은 인정하는 바이다. 


오히려 시간을 붙잡으려 할수록 잡을 수 없었고, 남는 것은 나에 대한 불신과 뭔가를 낭비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죄책감이었다. 


지금 나는 계획하되,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계획도 내가 만들어 놓은 에고의 표현일 수 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자 세워놓은 계획은 마음에 저항이 있더라도 해내는 편이 긍정적인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계획해 놓은 것들에 집착하기보다는, 지금 나의 마음을 따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나 자신에게 토닥여주고 싶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나'이지만, 지금 마음이나 몸이 끌리는 것을 하고자 하는 것도 '나'이다. 둘 중에 하나만 '내 편'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외부 압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던 '나'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내가 싫어한다고 여기던 방식으로 나를 인도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나는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의무감을 주고 그대로 수행하지 못함에 자책하기보다는 어, 그래 볼까? 하며 미워했던 (게으르고, 시간을 낭비하는) '나'와도 지내보는 것. 그렇게 나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것, 그것이 이번 자가격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 아닐까? 


덕분에 이 말을 한 번 더 실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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