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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Sep 13. 2020

2년 만에 복직을 했다.

첫째가 아홉 살이 되도록 육아휴직은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다. 


2년 전 나는 혼자 아홉 살, 여섯 살 두 아이를 돌보면서, 직장을 다님으로써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나를 피폐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굳이 짚어보자면, 나는 직장을 '다닌다'라는 표현은 웬만하면 쓰지 않고 싶다. 고군분투 끝에 우리 아이들을 남의 손에 맡기고,  들여다볼 것 못 보면서 시간을 만들고, 돈을 들이고, 열정을 짜내며 회사생활을 하는 것인데, 그렇게 의미 없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 욕심이었다. 20대부터 뜻도 모르면서 '나 자신'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삼고 살아온 지 20년이 넘어가는 중이었지만, 여전히 알지도 못하지만 어쩐지 의미 있어 보이는 명제를 붙잡지 않으면 내 인생이 고꾸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중요한 결정은 그다지 심사숙고 후에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한 직장선배가 '회사를 위해서 할 말은 아니지만, 선생님은 좀 쉬는 게 나을 것 같아'라고 얘기할 때,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생각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어느 날 불쑥 입 밖으로 휴직하겠다는 말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남편이 인도에서 주재원으로 일하고 있은지 일 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매사에 예민하고 불안하고 까다로운 아홉 살 아들에게는 특히 아빠의 존재가 필요했다. 아빠가 없다면 모를까, 버젓이 있는데 왜 나 혼자 모든 것을 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솔직히 휴직하지 않은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경제적 부담감과 관성의 법칙이었다. 비록 한 직장의 일꾼이긴 하지만, 전문직으로 15년 넘게 일을 하면서 웬만한 대기업에서 보다는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 수입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다른 재주도 없는데, 돈은 벌 때 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컸다. 남편도 주재원이 되면서 월급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러니깐 둘 다 벌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는 빚도 없는데 왜 그리 돈, 돈 거렸을까? 


관성의 법칙이란, 하던 일은 계속해야 더 잘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직장생활이란 다 같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전문성을 스펙과 업무 경험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학원 학위와 내 분야의 전문가 인증을 취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전공까지 방송통신대를 다니며 학위를 따기도 했다. 물론 감사히도 모두 업무 경험으로 연결되었고,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우리 직장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일꾼이었다. 여기서 잠시 멈춘다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까 봐 불안했다.


그런데,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돈과 사회적 역할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엄마와 아내로서의 페르소나를 잘 만들어 내는 것에는 분명히 때가 있다.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 나의 각 역할들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어느 하나가 정말로 다른 것들을 모두 희생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인도로 갔다. 그 중요하던 회사도 다니지 않고, 그렇게 좋아하던 영어 공부를 하루 종일 하면서, 책을 읽고, 마음 맞출 수 있는 이웃과 수다도 떨고, 어딘가 한국과 맞닿아있을 인도양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노스탤지어를 만끽하기도 하면서 2년을 보냈다. 


감사하게도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회사는 복직을 받아줬고, 새로운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금 일하는 곳은 우리 팀 유일의 환자 접점부서이다 보니, 하루 종일 최단시간에 개별 맞춤으로 약을 제공하는 것에 모든 역량이 집중되는 곳이다.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미뤄두더라도 일단 서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다리와 허리가 너무 아프다. 진료를 봐야 할지, 노화에 의한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일지도 고민 중이다. 처방에 맞게 약을 준비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일들을 배워나가면서 일꾼이라는 페르소나를 다시 다듬어가고 있는 중이다.


 입사동기나 후배보다도 승진이 늦었음은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인생은 길다. 사실 당장 삶이 끝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기는 하지만, 일단은 길다고 여기고 살아간다. 요즘은 정년이 연장되어서 앞으로도 십 년 넘게 일꾼으로 일 할 수 있다면, 지금의 업무 경험은 더욱 소중한 것이 될 것임을 안다. 이제는 내가 세워놓은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잘라내 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도 안다. 어디까지나 조직의 일원은 공동의 목적에 부합하게 행동하는 것이 존재 이유일 테니까. 그동안 회사의 높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목표, 성과 등에 맞추기 위해, 나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키워내는 것에 집중해 왔다면, 앞으로는 이 순간 나의 도움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마음을 맞추는 것에 집중해보려 한다.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융통성으로 많은 상황에서 평온하게 살아가게 되길 바란다. 생각의 끝에서 내 삶의 가능성과 방향에 대해 작은 떨림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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