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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용근 Oct 20. 2023

생각이 생각으로 끝나지 않을 때

답을 찾는 질문을 넘어 행동에도 영향을 주다.

앞서 표현했던 "불"이란 주제를 바탕으로 참 많은 사물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나의 색다른 모습을 조금씩 발견했다. 내가 느끼는 나의 색다른 느낌은 내 관점과 내 행동 그리고 내 심리가 조금씩 바뀌는 경험이었다. 




[돌아가셨다. 그 말의 의미]

가족들과 함께 점심 식사 후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번에도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셨다. 일제 강점기에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셨다는 이야기였다. 전쟁의 참상은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아버지 때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고 이야기하셨다. 한 집에 가장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버틸 집이 얼마나 있을까란 생각에 마음 한편이 쓰려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조상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온 가족이 모이면 자주 하시는 이야기는 늘 같은 이야기였다. 


"조상님을 잘 모셔야 하는 일이 잘된다. 그리고 잘 보살펴 주신다." 

언제 들어도 이 말은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를 대변해 주는 이야기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던 중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 중에 '돌아가셨다'는 의미에 호기심이 생겼다. '돌아가셨다'라는 말은 평소에도 세상을 먼저 떠난 분들을 표현할 때 썼던 말이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돌아가셨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말 그대로 생각해 보면 돌아갈 곳이 있다. 아니면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뭔가 해소가 되지 않는 느낌이 들어 재미있는 주제라 여기고 '돌아가셨다'는 말에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언제 최초로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렴풋이 생각해 보면 최소 반만년 전 그 어디쯤부터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다. 언제부터 누가 사용했는지를 당장 알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석해 보기로 했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땅, 흙,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말로 여겨진다. 그런데 의문인 것은 땅, 흙,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걸로 끝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생각의 결론은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간 몸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나아가 미생물과 곤충의 양분이 되고 그 곤충을 새가 먹는다. 새는 또 최상위 포식자로 이어져있다. 그 최상위 포식자에는 우리 인간이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반복되는 듯한 느낌, 사이클이 도는 그림이 그려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내가 존재하기 전, 더 나아가 인간이 존재하기 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 동식물들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반복되었을 것이다. 이 반복되는 모습은 다시 나에게로 오고, 나 이후의 다음 세대로 연결되어 있다. 만역에 다음으로 연결된 생명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니 인간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보면 그저 이전의 생명이 그다음 세대 생명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있음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한발 더 나아가 이루기 지칭했던 수많은 이름과 모습을 모두 지우고 바라보면 더 새롭게 보였다. 마치 앞서 살았던 내가 지금의 나로 이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 보니 갑자기 온통 세상이 다 나로 보였다. 마치 내가 아닌 게 없다고 느껴지는 이상하고 오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옆에 계시는 아버지를 보자 아버지가 아버지로 보이지 않고 앞서 살았던 나로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내가 아버지라고 규정하고 바라보고 관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버지였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앞서 살았던 나라고 생각하고 보니 앞서 살았던 나로 보였다. 


내 관점이 바뀌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아버지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보다 아버지가 더 편해졌고 대화도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후로도 아버지를 대하는 내 마음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나는 '돌아가셨다'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했을 뿐인데 아버지와 가까워지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생각이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내 삶을 조금씩 바꿔놓는 느낌을 받았다. 


[70조 개의 세포]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앞서 생각한 생각을 좀 더 이어서 생각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앞서 생명이란 단어를 이야기했던 것을 생각하고 이번에는 생명에서 세포로 바꿔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정보를 먼저 접하기 이해 검색을 하던 중 재미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가 대략 70조 개나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70조 개의 세포'라는 문장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렇게 내 호기심을 채워줄 주제가 정해졌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가 70조 개 

그럼 나는 70조 개의 세포가 모여서 만들어진 존재

하지만 나는 하나라고 느껴지는 존재 


나는 70조 개의 세포인가 하나의 나인가


나를 70조 개의 세포로 나눠보면

그 세포 하나하나가 다 나인가 아니면

70조 개의 세포가 하나로 융합해서 만들어진 지금의 내가 나인가


그럼 나는 하나이기도 하고 

70조 개의 세포이기도 한가


하나도 나고 70조 개의 세포도 나인가 


둘 다 맞다면 

하나의 나를 70조 개의 세포로 나눠도 나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아닌 게 없었다. 나를 70조 개의 세포로 나눠봐도 나고 70조 개의 세포를 하나의 나로 합쳐도 여전히 나다. 이 생각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사람이자 인간이다. 

인간은 전 세계 77억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나는 77억 명 중에 한 인간이다. 

나라는 한 인간은 77억 명에 속해있다.  


나는 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77억 명이라는 인간을 나타내는 

하나의 세포와도 같은 존재이다. 


77억 명이라는 전체를 인간이라는 교집합으로 묶을 수 있고

그중에 나라는 한 인간을 독립적인 인간으로 표현할 수 도 있다.


나는 독립적인 나 이면서 동시에 77억 명이라는 인간의 교집합에 속해있다. 

그래서 나는 77억 명에 속해있으면 동시에 하나의 내가 된다. 


나는 독립적인 나이면서 동시에 77억 명 전체에 속해있다.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전체를 대변한다.

마치 부분과 전체가 같다는 의미이다.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듯 

나는 나이자 전체이고 전체는 전체이자 나이다. 


나는 독립적인 내가 될 수도 있고 77억 명의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이고 동시에 77억 명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자 단순히 생각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진짜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이 스며들 듯 느껴졌다. 마치 세상 곳곳에 희로애락이 느껴지듯 극심한 고통과 안타까움 그리고 기쁨의 감정이 뒤섞이면서 쏟아졌다. 평소 느끼지 못했던 내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친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컨디션을 되찾기 위해 가볍게 산책을 나섰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방금 전에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떠올렸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인가"라는 생각이었다. 


이 말의 의미는 나는 나이면서 77억 명이 나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 생각을 좀 더 이어서 이렇게 생각해 봤다. 그렇다면 왜 77억 명이 나라고 느껴지지 않고 나라는 한 사람으로서만 느껴지는 것일까, 77억 명이 하나의 나처럼 연결될 수 도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책을 하던 나는 내 앞에 택배박스가 쌓여있는 관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무거워 보이는 택배를 들어 택배기사님에게 전달해주고 그 길을 지나쳤다. 내가 들어준 택배를 받아 든 기사는 당황스럽다는 듯 주춤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뒤이어 건네주었다. 그리고 산책이 끝날 때쯤 음료를 마시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는데 그 어느 때 보다 진심이 담긴 인사라고 느껴지는 인사였다. 내 인사에 편의점 직원분도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인사를 받는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타적인 행동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나도 사실 놀라긴 했다. 평소 같으면 형식적인 인사 정도는 했을 테지만 앞서 생각한 생각들이 이렇게까지 영향을 준 것은 내 경험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나를 관찰하는 일이 늘어났다. 내 신기한 경험과 이상한 생각들은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함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나라고 인지하는 것]

그래서 나는 내가 나라고 인지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한 나는 이번에는 거침없이 생각을 이어갔다. 




내가 나를 인지한다. 이 말에는 두 개의 지점이 있다. 


'내가'라고 표현한 첫 번째 '나'와

'나를'이라고 표현한 두 번째 '나'이다. 


'내가'라고 표현한 나는 '관찰자의 나'이고 

'나를'이라고 표현한 나는 '관찰 대상자의 나'이다. 


결론은 내가 나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관찰자'가 '나'라는 '관찰대상자'를 알아차려야만  


'내가 나를' '인지' 할 수 있다. 



이 생각으로 나는 부분적인 나도 전체적인 나도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지해야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나를 인지한다. 나라는 관찰자가 나라는 관찰대상자를 인지해야 한다는 것은 '나라는 의식이 나라는 무의식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오묘하고 신기하다. 하지만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생각이었다. 결국 부분이라는 내가 전체라는 나를 인지하면 그때 부분의 나뿐만 아니라 전체의 나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이번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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