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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Jul 25. 2023

다시, <결혼. 여름>

23.07.25



작년 4월, 지인과 제주도를 갔을 때다. 좋아하는 작가 김민철의 책들을 보면서 내내 카뮈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그리고 동네 도서관에 강의를 왔을 때도 김민철작가는 피피티에 카뮈의 구절을 옮겨왔다. 김민철작가의 책들에 불쑥 한 번씩 등장하는 카뮈는 그녀에겐 굉장한 행복에 관한 더할 나위 없는 전향적인 전환점이라고 나는 생각했고, 그것에 늘 동의가 되었다. 그래서 김민철작가가 아닌 직접 카뮈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궁금하기만 할 뿐 선뜻 카뮈를 읽을 자신이 없었다. 한 줄 읽어보지도 않은 채 내가 과연 김민철작가를 통하지 않고 카뮈에서 그 행복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몇 페이지나 읽어 넘길 수 있을까. 그러다 포기하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만을 쌓아갔다.




그러다 제주여행을 앞두고는 아름다운 제주에서 카뮈를 읽기로 했다. 분명 여행이라는 비일상은 독서에도 영향을 주기에 그러기로 했다. 그리곤 도서관에서 카뮈의 <결혼. 여름>을 빌렸다. 이럴 수가. 역시나 역시였다. 누렇다 못해 노란 종이색과 올드한 글씨체에 얼마나 폰트는 작은지. '그래, 제주도니까 가능할 거야.' 제주도에 도착할 때까지 결코 표지도 넘겨보지 않았다. 미리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주도에 도착해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지인이 온라인회의를 하는 동안 나는 드디어 책을 펼쳤다. 이 순간에 지인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기고 생생한 그 감정은 죽는 날까지 잊지 않았으면 싶다.




첫 페이지 '봄의 티파사엔 신들이 머문다. 태양과 압생트 풀 향기 속에서.... 들판이 태양빛에 새까매진다... 슈누어 산.... 알제리의 여름 대지가 아릿하고... 분홍빛 부겐빌레아...'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당체 나는 이 묘사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지지가 않았다. 지명은 지명대로, 묘사는 묘사대로 그저 글자와 종이일 따름이고 한 문장이라도 말이 되는건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첫 페이지에서 절망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이 정도로 난해해할 줄이야. 어서 지인이 회의를 마치길 바랐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 오기까지 이 책에 대한 기대감과 지금의 이 당혹스러움을 토로하고 싶었다. 지인이 온라인 회의를 마치지 마자 나는 책을 건네며 첫 페이지를 읽어보라며 내밀었다. '이게 왜?' 지인의 반응에 기다렸단 듯이 도저히 페이지를 넘길 수 없다는 심정을, 당연하지 않냐고 얼굴 붉히며 토해냈다.




'자기야, 압생트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 향기 속에 신이 산다잖아... 뭔지가 중요해? 그냥 느껴'




'맙소사. 그녀와의 동행을 사랑합니다.' 늘 공감과 마음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이어 어떤 말들을 뱉어냈지만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분명한 건 그녀는 카뮈를 느끼며 읽었고 나에게 표정과 황홀한 말투와 팔과 동작으로 그 느낌을 가시적으로 보여줬다. 지금도 그녀의 말투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카뮈보다 그녀로부터 카뮈의 <결혼. 여름>을 읽을 수 있는 전향적 태도를 캐취했다. 사실 이 날 나에겐 이것이 카뮈로부터 찾은 김민철작가의 행복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제주여행 내내 매일 몇 페이지씩 힘들이지 않고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이해가 안 가도 괜찮았다. 책을 완독 하진 못했지만 이만하면 되었다고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책은 더 이상 펼치지 않고 그대로 도서관에 반납했지만 이후에도 나는 다른 작가를 통해 또 카뮈의 한 구절을 읽었고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통해  그 구절에 행복해했다.




그렇게 카뮈는 다시 읽을 도서 목록에만 존재했는데, 며칠 전 sns를 통해 작은 책방에서 <결혼. 여름>을 좋아하는 초록의 양장을 씌워 재발간한 걸 알았다. 반납일에 재촉당하지 않고 얼마가 걸리든 천천히 내키는 대로 읽어 이 책은 완독을 하고 싶어졌다. 자주 없이 매우 충동적이었다. 바로 온라인 주문을 하고 오늘 책이 도착했다. 초록의 양장, 하하. 첫 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작년 제주의 카페에서 그녀가 보여준 쳇페이지의 예술적 표현은 어쩜 나에겐 카뮈를 펼친것보다 인상적이었고 오래 기억될 추억이다. 그러고 보니 카뮈가 준 행복이라면 이것이겠다. 지금은 공간도 뭣도 그때와는 전혀 다르지만 또 오늘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카뮈를 음미하려고 한다. 어떤 기억을 남겨줄지 기대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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