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만 더 무해하게 살아보기 /
22.05.18
재작년까지 세탁소는 체인 세탁소를 이용했다. 일단 동네 세탁소가 가까이 없었다. 아마도 없어진 게 아닐까 싶다. 체인 세탁소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었고 이런저런 시즌 할인이 있었다. 거리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용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즌엔 무게만큼이나 개수도 많고 비용도 만만치 않은 겨울옷은 세일 기간을 노려 세탁을 하면 득이었다. 또 생일이 되면 할인을 해주었으니 3월이 생일인 나는 겨울옷을 세탁하는데 비용만을 고려한다면 얼마든지 이롭다고 생각되는 조건을 체인 세탁소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해결안 되고 내 손에 남는 골칫덩이가 있었으니 바로 옷걸이였다.
옷걸이는 재활용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반쓰레기로 버리려니 상당한 양의 뻣뻣한 그리고 너무나 멀쩡한 옷걸이를 버린다는 건 양심적으로도 가당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이리저리 구부려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한계였다. 그렇게 버리지 못하고 모은 옷걸이가 백개는 되었을까. 늘 생각했다. 세탁소 옷걸이는 집에 들이지 않는 게 상책 중의 상책이구나. 그러면서도 체인 세탁소를 이용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눈감고 존재하는 옷걸이를 못 본 채 하고 살았던 것이다.
작년에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는 옷걸이를 더 이상 못 본 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사를 하면 체인 세탁소를 이용하지 않아야겠다 마음먹었다. 다행히 지금 사는 곳은 동네 세탁소가 주변에 여럿이 있고 체인 세탁소도 물론 있었다. 세탁 가격은 확실히 비쌌다. 그 전처럼 겨울옷을 맡기면 세탁비는 상당한 목돈이었다. 지난겨울은 옷을 맡기고 돌아서는 목덜미가 살짝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탁된 옷을 찾아 나설 때는 더 이상 처치 곤란한 숙제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옷걸이는 빼고 가져갈 수 있으니 말이다.
'옷걸이는 놓고 갈게요'
말씀을 드리면 흔쾌히 옷걸이를 빼고 주신다. 왜냐면 재사용을 할 수 있으니까.
체인 세탁소는 일련의 시스템으로 세탁물 접수부터 이루어지다 보니 옷을 맡기는 개개인의 요구를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네 세탁소는 그럴 여지가 있었던 거다.
옷을 맡길 때 비닐도 없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이건 재활용이 되지 않을뿐더러 드라이클리닝 후 화학물질 때문에 씌워둬야 한다는 걸 보니 매캐한 세탁소 냄새가 그 물질이구나 싶었다. 세탁소 사장님의 건강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구나 싶으니 현실적으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좋을 리 없는 물질일 테니 알고 보면 드라이클리닝 같은 세탁은 가급적 줄여보자는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집에서 하는 세탁으로 옷이 망가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후 세탁소로 가는 옷의 나름의 기준을 다시 세웠다. 오리털은 울세탁으로 조심히 빨고 대신 말리고 관리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잘 뉘어 말리고, 뭉치고 숨 죽은 털을 살리는데 공을 들였다. 사실 이 과정이 귀찮았던 거다. 인정한다. 옷장에서 꺼내 세탁소를 꺼쳐 그대로 옷장에 넣어 다음 겨울에 아무 수고롭지 않게 다시 그 점퍼를 꺼내 입고 싶었던 거다. 니트도 웬만한 것은 울세탁과 손빨래로 대신했다.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세탁물 얼추 1/3 정도만 세탁소로 보냈다. 그리고 찾아올 때는 물론 옷걸이가 없었다.
살아가는데 집안에서 모든 것을 자급하고 해결할 수는 없다. 너무 당연하다. 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늘 새로운 것이 집안으로 들어오고 분명 버려져 나가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한번 당연한가? 질문을 던져본다. 그럼 반드시 생각과 행동의 습관이 발견되고 습관은 상당히 편리에 젖어있다. 편리와 함께 찾아오는 해로운 것들은 놓친 채 말이다. 예를 들면 처치곤란 옷걸이, 해로운 세탁 화학물질, 자꾸 중요한 걸 놓치게 만드는 습관들의 확장 같은 것 말이다.
오늘도 내가 할 수 없다면 과감히 미루고, 할 수 있는 것은 미루지 않는 것을 향해 살아본다.
옷걸이 없는 홀가분함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