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작용 없는 미루기

/ 조금만 더 무해하게 살아보기 /

by 밀품

23.02.01



언제부턴가 소비하는 것의 종류를 떠나 뭐든 사는 행동 안에 습관 같은 것이 생겼다. 잠시 구매를 미루는 것인데 꽤나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스마트한 사람이라 생각하게 해주는 긍정적인 효과까지 덤으로 따라온다. 아마도 살면서 숫하게 자진해 구매를 미루기보다는 구매할 수 없는 여건에 떠밀려 포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 가진 것 없는 작은 존재로 오래 살았다.




무엇이 시작이었을까. 옷이었을까, 식재료였을까. 기억은 향기처럼 날아가고 어렴풋이 그 자리만 남아 뭐다 떠오르진 않지만 예상컨대 식재료가 아닐까 싶다. 요리를 즐기는 나로선 제철마다 찾아오는 생그러운 식재료들에 너무도 호기심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의 냉장고가 배부르진 않은지, 그래서 한 칸 정도는 비워져 있는지, 이미 있는 반찬들로 충분히 끼니를 먹는데 부족함이 없는지 잠시만 현실파악을 해보는 것이다. 그럼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나갈 채비를 미루거나 노트북을 닫는다.




무언가를 많이 포기하거나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냥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창을 닫아버리면 며칠은 그것 없이도 불편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더러 그것이 아예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비로소 지금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후의 소비패턴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말이다.




보통 사고 싶다는 욕망은 대단히 급작스럽게 찾아올 때가 많다. 잠시만 그 천둥번개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훨씬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그것의 필요성을 내다볼 수 있다. 가령 연근조림이 먹고 싶어 연근을 구매하고 싶다 할 때 연근을 지금 구매해야 하는 이유는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도 구매를 정당화하기에 참 그지없이 매력적이다. 일단 먹고 싶고 지금이 제철이고 차일피일 미루다 제철은 지나가고, 다른 제철 채소가 등장할 것이며, 어차피 제철채소는 그 종류가 많고 많기에 냉장고 사정 따위를 다 따지면 먹을 게 없다고 내 안에서 속삭인다. 하지만 일어나 냉장고를 한번 열어보면 며칠은 내 밥상을 차리기에 무수한 가능성이 그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안에 속삭이는 합당한 구매이유를 정당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지만, 만약 소비와 음식쓰레기를 줄이고자 하는 변화에 가치를 둔다면 평소와 다른 결의 소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태풍 같은 욕망의 속삭임을 한결 미약하게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건 경험상 나를 컨트롤하는 큰 힘이다.




그러면서 모두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사는 것의 효용을 느끼고 있다. 우리 집으로 들어와 남아서, 사용하지 않아서 집밖으로 나가는 일만큼은 최소화하는 것이 요즘 분리수거함을 보면 이보다 꾸준해야 할 일이 있을까 내 일상을 뒤적뒤적해 보게 된다. 미루어도 부작용이 없는 무해한 습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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