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건
연출: 션 베이커
각본: 션 베이커
개봉: 2024.11.06
장르: 드라마, 코미디, 멜로·로맨스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국가: 미국
러닝타임: 139분
결코 이 사랑을 놓지 않을 것. 뉴욕의 스트리퍼 ‘아노라’는 자신의 바를 찾은 철부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만나게 되고 충동적인 사랑을 믿고 허황된 신분 상승을 꿈꾸며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꿨던 것도 잠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반’의 부모님이 아들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자 길길이 날뛰며 미국에 있는 하수인 3인방에게 둘을 잡아 혼인무효소송을 진행할 것을 지시한다. 하수인 3인이 들이닥치자 부모님이 무서워 겁에 질린 남편 ‘이반’은 ‘아노라’를 버린 채 홀로 도망친다. ‘이반’을 찾아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은 ‘아노라’와 어떻게든 ‘이반’을 찾아 혼인무효소송을 시켜야만 하는 하수인 3인방의 대환장 발악이 시작된다.
션 베이커 감독님의 <아노라>.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만큼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인지라 개봉했을 때부터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 보니 이제야 보게 되었는데 이전의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조금은 비슷한 결을 가지는 작품이라 느꼈다. 우리 사회의 모습 중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일정 부분 가려져 있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리고 이런 사회의 일부분을 현실성 있게 담아내었다. 하지만 <아노라>는 20대 초반 주인공의 시점에서 자본주의의 물질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영화의 수위도 높았다.
아노라는 뉴욕 클럽의 에이스 스트리퍼이다. 그리고 일을 하던 중 고객으로 온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만나게 된다. 둘은 클럽 밖에서도 만남을 이어가는데 어느 날 이반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싫다며 아노라에게 충동적인 청혼을 한다. 그렇게 아노라와 이반은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이 결혼으로 아노라는 신데렐라가 되기를 꿈꿨을 것이다. 화려한 곳에서 잘 나가는 스트리퍼로 일하던 그녀의 일상은 화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삭막한 삶을 살았다. 또 본명인 아노라 대신 애니라는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본인의 처지를 싫어했다. 그런 그녀에게 재벌과의 결혼은 얼마나 꿈같은 일이었을까. 하지만 둘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돈이라는 물질로 관계를 이어가던 이들이었기에 그 속에서 사랑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을 통해 서로 원하는 걸 얻었으니 된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으나, 건강한 관계가 아님은 확실했다. 자본주의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반의 부모님이 둘의 혼인 소식을 알게 되는데 그들은 미국에 있던 하수인 세 명에게 혼인무효소송 진행을 지시한다. 부모님이 무서웠던 이반은 하수인들에게 저항하다 결국 아노라만 남겨둔 채 홀로 도망쳐버린다. 하수인들은 혼인 무효를 위해, 아노라는 혼인 무효를 막기 위해 함께 이반을 찾아다닌다. 우여곡절 끝에 이반을 찾아내는데 그는 아노라와 달리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순순히 혼인 무효 절차를 밟는다. 그에게 아노라는 그저 잠깐의 즐거움을 위한 상대였을 뿐이다. 그렇게 아노라는 동화 속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아노라가 혼인무효소송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의 구원자인 이반을 사랑하게 되어 그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건지, 허무맹랑한 결혼임을 알면서도 꿈에서 깨어나기 싫어서 그랬던 건지 말이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으나, 둘의 관계만으로 계층 차이의 벽을 허물 순 없었다.
그런 아노라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건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고르라는 인물이었다. 이고르는 하수인 세 명 중에서 직급이 가장 낮아 보이는 한 명인데 아노라와 대립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녀에게 연민의 눈빛을 보낸다. 아노라도 클럽에서 고객을 상대로 일하듯이 이고르도 자신을 고용한 이반의 부모님을 상대로 일해야 하고, 두 캐릭터 모두 사회의 비주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닮아있었다. 그래서 이고르는 아노라에게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싫었던 아노라는 이고르에게 심하고 거친 말들을 내뱉는다. 이렇게 아노라가 그를 밀어내려 함에도 불구하고 이고르는 그녀를 외면하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아노라의 곁에서 위로를 건네며 그녀가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를 통해 결국은 사회적으로 유사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끼리 살아가게 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그 메시지는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더욱 부각되었다. 이고르의 진심에 아노라도 마음을 여는 듯했으나, 그녀는 끝내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신의 비참한 현실에 눈물을 쏟는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좋든 싫든 현재의 생활환경을 벗어나기란 어려우니 그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자본주의, 물질주의 사회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 하층민들의 모습을 희망적이기보다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을 받을 수 있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뒷 내용과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고, 쾌락이라는 걸 보다 자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대중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였다. 추가로 하수인 3명의 모습에서는 코믹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아노라>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영화였다.